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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May 10. 2021

과거에서 온 답장

이십 년 전 록음악과 이틀 전 에세이의 만남

'깊은 밤엔 락이 좋다'

한 20년 전 쯤이었나. MBC 라디오 심야방송 중에 <깊은 밤 락이 좋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록음악을 좋아지만 중고교 시절만큼 열렬한 라디오 청취자도 아니었고 심야방송이라 더더욱 그 방송을 챙겨듣 못했다. 어쩌다 한번씩 들었던 그 프로그램과 김완태 DJ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스포츠 중계를 하던 아나운서가 뜬금없이  전문 라디오 프로 진행을 맡았다는 것과 그가 사실은 니아였다는 상상도 못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깔끔한 이미지 똑똑한 지상파 아나운서가 거친 록음악 마니아라니.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리고 철없던 내 생각에 그건 정말 '깨는' 이미지였다. 고 스펙의 방송인들은 클래식만 듣는 줄 알았다. 그 깨는 이미지 때문인지 아직도 그 방송과 DJ가 인상깊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 벅스 플레이어 앱에서 오랜만에 라디오나 들어보자 싶어 뮤직캐스트 카테고리를 뒤졌다. 오잉? 거기에 김완태 아나운서의 방송 목록 있는 게 아닌가! <오늘 밤엔 락이 좋다> 방송국 시절과는 조금 다른 타이틀이지만 썸네일을 장식하고 있는 똘망똘망한 인상 남자는 내가 기억하는 김태 아나운서가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재생버튼을 찍었다.


그의 뮤직캐스트는 20여년 전에 듣던 심야라디오 프로와는 정서가 조금 달랐지만 (대중적 성향이 강해졌다) 그 시절의 DJ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나는 20년 전과 같은 서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마치 20년 전의 과거로 그대로 되돌려진 것 같았다. 김 DJ의 선곡도 청취자의 신청곡도 함께 20년의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더 따뜻하고 친숙하고 정겨운 방송이었다.

'취미가'

벅스 뮤직캐스트에 밤락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무렵, 에이플랫 출판사에서 나에게 책을 보내왔다. 작가들의 덕질을 다룬 취미 잡학사전 <취미가>가 그것이다. 원래 이 책은 전자책 시리즈로 먼저 만들어졌다가 크라우드 펀딩을 거쳐 종이책으로 재탄생했다. <취미가>에는 다양한 분야의 서른 명 넘는 작가들이 각자 즐기고 있는 취미와 덕질에 관해 쓴 짧은 에세이들이 모여 있다. 나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만의 덕질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거절하려다가, 록음악을 좋아해 밴드를 하고 미디음악 장비까지 마련해서 어설프게 작곡가 흉내를 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이 책의 공저자가 되었다. 전자책이 출간되었을 때와 종이책 증정본을 받았을 때의 기분은 조금 달랐다. 손으로 분량을 가늠할 수 있는 두꺼운 백과사전 속에 내 필명이 실려 있는 기분은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취미로 록 밴드 활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담긴 <취미가>와 뮤직캐스트 <밤.락.>은 과거 어느 시기에 함께 시작된 것이다. 라디오 <밤.락.>은 잠 안 오는 한밤중에 나를 찾아온 친구였고, 그 시절 록에 빠졌던 내 이야기를 <취미가>에 실을 수 있었고, <취미가>가 완성될 때쯤 뮤직캐스트  <밤.락.>과 새롭게 그리고 또 다시 만났다.


과거는 현재와 만난다

과거가 중첩된 것이 현재라는 말은 좀 거창하다. 하지만 부정하기는 어렵다. 과거는 늘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지금 현재는 미래와 연결될 것이기에 우리는 대강이나마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며칠 전에 엉뚱한 상상을 해 봤다. 요즘 나는 온라인 프리셀 프로젝트에 빠져 지내는데, 전 세계 플레이어들과 경쟁하느라 멈추질 못하고 있다. 온라인이 아니었다면 며칠 하다 지겨워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매일 초기화되는 순위 목록에서 때때로 운 좋게 내 이름이 상위권에 뜨면 뿌듯해서 사진으로 저장도 해둔다. 순위권에는 자주 보이는 이름들이 있는데, 왠지 현실 어딘가에서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나면 "혹시 프리셀...?" 하고 물을 것만 같다. 뭐 그건 그렇고, 엉뚱한 상상이란 뭐냐면 혹시 프리셀 대회 같은 게 열리면 익숙한 이름의 랭커들이 초청되지 않을까, 그리고 혹시 나한테도 초청장이 오지 않을까 하는 공상이다. (나는 실력자가 아니므로 진짜 공상일 뿐이다.) <밤.락.> 듣던 청년이 20년 후에 취미로 밴드 에세이를 남기게 된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지금 여기 브런치에 이렇게 몇 줄의 글을 남기는 일은 지금 당장 나에게 아무런 피드백을 주지 않는다. 원래 글이란 게 속성 자체가 피드백이 늦고 성취감이 뒤늦게 찾아오는 것이기는 하다. 20년 혹은 30년 후에 혹은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세상으로부터 늦은 답장을 받을지도 모른다. 매일 매순간 답장이 날아오고 도파민이 출렁거리면 좋겠지만 그건 하루를 1년처럼 사는 수명 짧고 심박 빠른 작은 동물들의 삶 같지 않은가. 지금 당장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당장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이라도 그냥 해보는 것이다. 언젠가 미래에서 오늘의 그것과 다시 만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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