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살림꾼이라는 부캐의 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빼는가이다.
-프랭크 소넨버그
작아지고 계절이 지난 옷가지와 미니멀하게 살기 위해 처분하려던 각종 짐들을 11월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테트리스 물건 정리는 꽤 잘하는데 비우며 하는 정리가 나에게는 어려웠다. 왜 이렇게 버릴 질 못하는지. 언젠가 토크쇼를 통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특정 물건에 얽힌 기억과 추억, 그리고 감정이입으로 잘 버리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와. 딱 내 얘기네.'
'물건에 추억과 가치를 부여해 놓고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 여기 한 명 추가요.'
아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해준 선물이라서. 다시 살 빼면 입겠다는 의지가 충만하게 담긴 옷이라서. 처음으로 취업해서 산 물건이라서. 엄마랑 어릴 때 추억이 있는 물건이라서. 임신해서 앉아있기도 힘든 시절 첫 아이에게 주고 싶어 꼬리뼈 아픈 것도 참고 만들어준 인형이라서. 엄격한 집에서 겁보 내향인으로 살아온 내가 혼자 도전한 배낭여행을 기념하며 사 온 것이라서. 결혼식 때 맞춘 한복인데 입을 일이 생길지 몰라서.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들로 비우지 못했고, 비우지 못하니 정리가 잘 될 리 없었다.
의미 부여한 물건들을 모아두니 집은 점점 작아지고,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공간도 줄어들었다. 청소시간은 늘어나고 수납장은 계속 필요했다. 정리를 위한 정리가 아닌 테트리스를 잘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짐을 줄일 수 있게 되면 그때 꼭 미니멀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는 언제 실천할 수 있을지 늘 의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아이들도 나처럼 물건 속에 추억을 담아 다시 보지 않으면서도 간직하고 싶어 버리지 못하는 점을 닮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지금이 바로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완벽한 타이밍은 없다.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작은 시작이 중요하다.'
정리되지 않은 공간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만든다
- 마리 콘도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책이나 교육영상을 통해 전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사람. 네, 접니다. 이번에도 괜찮아 보이는 책 두 권을 집어 들고 필요한 정보들을 쏙쏙 캐내어 생각주머니에 담았다. 담기만 하지 말고 바로 꺼내 써먹어야지라는 굳은 결심과 함께. 정리가 어려운 사람은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두고 한 번에 버리기보다 1일 1 구역 법칙이 더 효율적이라는 말에 혹했다. 그 방법이 부담 없이 바로 실천하기 좋은 것 같아 매일 한 구역씩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오래 미뤄두었던 미니멀 살림을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추억과 가치는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니 소중한 것은 사진, 글 그리고 마음에 담아낸다. 물건은 그저 물건일 뿐이니 애착을 버리고 필요한 곳에 잘 보내주리라.
당장은 겨울 옷 정리가 최우선이라 그것부터 시작했다. 작년과 올해 입지 않았던 옷, 살 빼고 꼭 입으려던 옷, 건조기 다이어트를 한 옷, 온라인으로 사서 사이즈가 맞지 않아 못 입었던 옷들을 과감하게 꺼냈다. 새 옷이나 몇 번 입지 않아 깨끗한 아이들 옷, 장난감, 그리고 책들은 물려주는 동생들이 있어 매년 보내주고 있어 정리가 쉬웠다. 도시 살 때는 아름다운 가게나 한살림에 가서 기부를 했었는데 여기는 기부할 곳이 마땅히 없다. 괜찮은 그릇이나 물건들은 재활용 수거공간에 있는 헌 옷 수거함과 당근 기부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리를 3일 하고 나니 큰 수납함 6개가 필요 없어졌다. 지금 있는 서랍장과 옷장에 사계절 옷이 다 들어갔다.
'속이 다 후련하네, 이렇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을 나는 다 이고 지고 있었구나.'
다음은 거실과 아이들 방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예쁘지만 다시 보지 않는 작품들. 아이들에게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 쓰지 않는 것들을 골라내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음~ 이번에는 그 눈에 절대 안 넘어갈 거야.'
생각 끝에 간직하고 싶은 의미가 있는 것은 밴드에 각자의 작품집을 만들어 준 다음 사진을 찍어 올리면서 남기고 싶은 말도 같이 써두자고 했다. 그걸 쓸 정도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의도를 조용히 숨기고 아직 버리기를 많이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생각해 낸 나름의 비책이었다. 단, 최신작은 일정한 전시기간을 주는 걸로. 줄 수 있는 것들은 원하는 친구나 동생들에게 나눠 주고, 올해 12월 학교에서 열릴 벼룩시장에 내놓을 물건들은 따로 담아서 내놓게 했다. 이런 일상을 통해 정리와 나눔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담아. 이것만 했는데도 거실과 방이 모두 깨끗해져서 꽤 만족스러웠다. 조금 비웠을 뿐인데도 눈에 띄게 달라진 변화를 보니 다음 정리에 대한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어버렸다. 한 구역씩 정리하니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여유있게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어서 딱 좋았다. 정리를 하면서 혼자 당황하고 웃으며 추억여행도 하고 글감도 얻었다. 그야말로 일거양득.
'너 아직도 있었니.'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언제 적 유물이니, 이건.'
'목도리 준 친구, 오겡끼데스까.'
'내가 이걸 입었다고? 어떻게? 나이들면 뼈도 살이 찌나?'
그렇게 나의 추억들을 보내는 과정을 거쳐 과감하게 미련 없이 보냈다. 이제 나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겨우 옷이랑 물건인데 유난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오랜 습관을 함께 떠내 보내는 과정이라 좀 별나게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슬쩍 합리화해 본다. 나에게는 이 정리가 단순한 청소의 의미에서 벗어나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삶의 지혜를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작이 반이니 미니멀 살림꾼이라는 부캐를 목표삼아 최대한 심플하게 살아보자.
정리는 물건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의 혼란까지 비워내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