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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라 Sep 01. 2019

직장인의 이해심과 화병 사이

우리의 물컵 안 물이  쏟아지기 전에 햇살에 말릴 필요가 있다.

화병 :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통증, 답답함, 불면 등의 신체적 문제로 나타나는 증세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대한민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 존재하는 문화 고유 장애 


직장인 9년 차임에도 회사에서 크게 화 내 본 적이 없다. 어느 팀 누구는 회의실을 뛰쳐나갔고 누구는 팀장과 단판을 지었고 어떤 직원 A와 B는 한바탕 하고 서로 사이가 안 좋으니 조심하라고 하던데, 슬프게도 나는 회사에서 화 한번 내 본 적이 없다.


첫 직장에 들어가고 3년 정도는 화 날 일이 없었다. 화를 내기엔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이 다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뭘 알아야 화를 내지. 3년이 지나고 나니 조금씩 무엇이 일반적인지 일반적이지 않은지 구분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경우인데?’ 

‘아니, 왜 일을 이렇게 하지? 왜 말은 저따구로 하지?..’ 


마음이 조금씩 보글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화를 내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계속 일할 사람인데, 껄끄럽게 적으로 만들지 말자. 저 사람도 힘들겠지.. 그냥 이번엔 이렇게 해결하고 다음에 일 겹치면 조심하자. 하고 넓은 바다 같은 이해심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어푸어푸


사실 모두에게 사람 좋고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중학교도 아니고 프로풰셔널하지 못하게 회사에 웬 감정싸움? 회사 안에 쌀쌀맞게 휙 고개를 돌리며 지나가는 누군가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른답지 못한 하수라고 생각했다.  

내가 희생하더라도 ‘어떤 일이라도 해내는 사람’이라는 멋들어진 커리어 우먼의 면모를 보이고 싶었다. 


그러다 5년 차에 화병이 왔다. 화병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싶었지만 있었다. 

전 같았으면 넓은 이해의 바다에서 배영하며 여유롭게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에도 얼굴이 새빨개지고 땀이 나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도, 길에서 화려하게 넘어져도, 술에 취해도! 얼굴은 절대 빨개지지 않던 내가 이제는 살짝 감정적인 말만 들어도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났다. 누가 봐도 티가 나게끔 아주 쌔 - 빨갛게. 


‘어? 왜 왜 이래! 나 화 안 났어! 야! 나 자신아! 나 화 안 났어! 진정해!!!’ 내면에 헐크와 대화하듯 얼굴색을 내리기 위해 다급히 마음속에 나에게 외쳐댔다. 정말 화가 날 만한 정도의 말이 아닌데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예전에는 100만큼의 화도 안팎으로도 잘 참아냈던 내가 이제는 1만큼의 감정에도 안에서 못 참고 나와버린 것이다. 내 안의 내가 대체 어떤 말에 또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질지 모르니 매주 회의실 조명을 끄고 회의하길 바랬다. 




새집증후군은 신규 건물의 건축자재 첨가물이 공기로부터 몸에 쌓이면서 악영향을 미치는 질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새집증후군은 몸 안에 축적이 되면 사라지지 않고 쌓인다. 쌓이는 동안 조금씩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물컵의 물을 붓듯, 물이 차오를 때는 모르다 컵 목까지 가득해져 왈칵! 하고 쏟아지는 순간 새집증후군에 걸리게 된다고 한다. 


한번 걸리면 한 방울만 더해져도 또 넘쳐버리기 때문에 컵 목에서 찰랑찰랑한 상태만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 마주하지도 못하고 화학용품 없는 깊은 산속에 사는 등 급격한 삶의 변화를 겪게 된다. 심지어 컵의 크기는 사람마다 달라서 언제 내 물컵이 넘칠지 모른다고 하니 정말 공포스러운 질병이다.


직장인의 마음에도 컵이 하나 있는 게 분명하다. 컵이 차곡차곡 쌓일 때는 이해심 넓게 포용할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지만 왈칵! 그 물이 넘치는 순간 화병이 되어 찰랑거리는 삶을 살게 된다. 몸속에 화가 쌓였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물 컵을 비워줄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 7년 차쯤부터 감정을 유연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무조건 참고 일을 해내는 게 커리어우먼이라거나, 모든 동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면서였다. 그 생각들이 내 물컵에는 확실히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제는 의지와 다르게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다. 


내 물컵의 물은 얼마나 차있을까? 쏟아지기 전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이 상황이나 사람을 정말 이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나 용기가 나지 않아 희생하고 넘어가자 하는 마음인지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 마음이 구분이 되었다면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밖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내 물컵 안의 물이 쏟아지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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