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집 지음
1.
직장생활 9년 차. 정신 차려보니 팀 안에서 나는 반골(反骨)이 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 회사는 선택근무제(*근로시간 출퇴근 시각을 근로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제도) 등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각종 제도들을 직원들에게 사용하게끔 끊임없이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꿈쩍하지 않는 팀장님의 방어선에 나는 홀로 총을 쏟아 대고 있었다.
'버젓이 있는 제도를 왜 못쓰게 하시나요?'
나 말고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다른 팀원들은 내 의견을 지지하면서도 아무도 팀장님 앞에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 혼자 불평불만 많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팀장님과의 갈등은 잦아지고 나는 지쳐 갔다. 이런 상황은 나에겐 익숙하지 않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의 나는 선생님 말씀은 잘 듣는 꽤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의 사고방식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에서 이렇게 반골이 되어 버린 것은 내겐 아주 생소하게 느껴졌다. 회사라는 조직이 갖는 논리는 내가 가진 상식과 많이 다른가보다.
힘듦은 생각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모를 정도로. 다만 아주 사소한 상황이 트리거가 되어 자신이 힘들었음을 깨닫는다. ‘싫존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펼치기 전까지 그 제목의 뜻을 몰랐기에 무심코 읽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내 눈에 그 의미가 들어왔다.
‘싫어하는 것도 존중해달라.’
그 '존중'이라는 단어가 내 눈동자를 스칠 때 왜 난 울컥했을까?
2.
몇 해전, 이 책을 쓴 작가의 첫 번째 책 ‘공채형 인간’을 꽤 흥미롭게 읽었었다. 책 속에는 작가의 대학 졸업 무렵부터 3년간의 직장생활 그리고 직장을 떠나 오랜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쓴 글들이 채워져 있었다. 삶이 예측 가능해져서 회사를 떠난다는 작가의 말은 읽는 당시에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지금까지도 내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마다 되새겨보는 말 중 하나이다.
여하튼 당시 그렇게 회사를 떠나 여행을 떠나는 작가를 속으로 응원했었다. 대리만족이랄까.
‘저는 이미 틀렸습니다. 님이라도 꼭 뜻하는 바 이루셔서 하나의 희망이 되어주세요.’
그렇게 작가가 여행을 떠난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던 중 새로운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접하고 책을 집어 들었다.
'싫존주의자 선언'. 이 책은 작가의 개인적인(불합리하거나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을 소개하고, 그것으로 비롯된 작가의 성찰과 다짐을 적었다. 다 읽고 나니, 작가의 감수성은 나보다 훨씬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이런 것까지 불편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납득이 가능하게끔 글로 풀어냈다. 나는 타인의 심리에 꽤 예민한 편이라 가끔은 ‘나는 왜 이렇게 마음 불편하게 살아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존감도 무너져 내린다. 작가는 글로써 풀어내고 글 안에서는 감정 또한 자유로워 보인다. 나는 혼자 보는 공책에서조차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스스로 답답할 지경이다.
3.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내 생각과 비교하면서 찬찬히 읽어보았다.
제도권 안에서도 학생들이 다양한 진로를 꿈꿀 수 있는 사회를 그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P110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자아 찾기'를 시작한 내 기회비용을 생각한다면, 탐색의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P135
제도권 안에서 충실히 생활하고 공부했던 나는 대학을 어디 갈지 고민했지 무엇을 전공할지, 무엇이 될지는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다. 그냥 해맑게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시험 등 목전에 놓인 목표만 보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회사원이 되어서야 나는 무엇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답을 모르겠다. 그게 문제다.
때로는 못 본 척, 모르는 척, 무관심한 척해주는 ‘계산된 무관심’이 인간에 대한 존중을 더 보여주기도 한다. P222
우리는 멀리서도 타인을 존중할 수 있고, 바로 옆에서도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다. 적어도 구경할 거라면, “걱정이 된다”는 말을 하며 핑계라도 대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P224
정말 공감했던 글귀이다. 일단 나는 남의 일(싸움구경 제외)에 관심이 극단적으로 없고 관심이 가더라고 의식적으로 무관심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의 관심이 전혀 그 상황에 도움이 안 될뿐더러 그저 어슬렁 거리는 내 모습에 나는 극한 혐오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곤란해진 상황에서 제3자의 어설픈 관심이 느껴질 때면, ‘제발 관심 좀 꺼주세요!’라고 외친다.
물론 마음속으로. 아무도 안 들리게.
가장 좋았던 글은 <완벽하지 않은 채식주의자>였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을 나 자신만의 완벽주의로 인해 시도조차 못해 놓친 시간들이 내 인생 대부분을 차지한다.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시도하고, 그 ‘하나’를 ‘둘, 셋’으로 늘려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 이 세상도 어설픈 사람들의 사소한 시도로 조금씩 확장된 결과일지 모른다. (중략) 완벽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P276
그러게 말이다. 머리로는 납득이 되나 왜 그리 행동에 옮겨지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혼자만의 완벽주의와 끊임없이 싸운다.
3장 제목인 <남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으로 산다>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장의 글들이 특히 공감이 되었다. 학벌주의로 인해 자아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해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는 나에게 다시 한번 생각할 여지를 주었다.
과락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사회적 기준선에 꾸역꾸역 나를 맞추고, 수많은 자격증과 대외활동에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겠지. 하지만 회사에 들어가도 휴대용 소화기를 사무실에 뿌리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다. 소화기면 다행이게, 불을 지르고 싶어질 거다. P134
이건 난데?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도록, 지금 저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P142
'작가님 부럽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잘 읽는다는 것은 다독이 아니라 다상량, 많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걸 되새긴다. P192
가끔 보면 책을 전혀 읽지 않아도 똑똑하고 성과물이 훌륭한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평소 생각을 많이, 그리고 깊게 하면서 통찰하는 힘이 생긴 게 아닐까 싶다. 반면 책을 읽어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사실 이런 사람이랑 소통하긴 더 힘들다.
"당신은 어떻게 늙고 싶나요?" P198
라는 작가의 시그니처 질문은 내 요즘 관심사이기도 하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는 '이제 내가 젊지만은 않는구나' 아니 '내가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 정말 많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를 생각하다 보니 어떻게 늙고 싶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에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끔 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4.
요즘은 글쓰기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작가의 글 쓰는 방식을 비중 있게 본다. 이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작가의 감정은 예민해 보이지만 글은 참 섬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꽤나 단련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