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에 있는 흔한 학생 중 하나였다. 만화를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학생. 가끔 엉뚱한 말도 던지고 말이다. 살면서 크게 열등감도 우월감도 느껴 본 적 없이 흐르는 대로 사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 나에게 작은 계기가 찾아왔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그 해,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는 너무 거셌고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나 스스로도 그림으로 정확히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몰랐고, 그림으로 잘 풀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부모님의 큰 벽에 좌절하고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다소 울적한 3년을 보냈다. 그래도 예전과 다른 점은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또다시 진로를 선택해야 할 무렵 나는 아주 큰 결단을 내렸다. 미대 진학에 도전하기 위해 고등학교 3학년 원서를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 결과 나는 수시도 정시도 원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특히 나는 수시가 훨씬 유리한 학생으로 수시 전형을 썼으면 큰 고생을 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학생이었다. 당시 미대에서 수시는 성적보다는 그림을 잘 그려야 했고 경쟁률도 높았다. 참 신기하게 그때의 나는 나의 노력을 외면할 만큼 미대가 가고 싶었다. 그렇게 과감히 원서를 쓰지 않고 부모님을 설득해 미술 학원을 다녔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미대 입시 도전은 내 삶에서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뭐든 천천히 배우는 편이었고 내 또래 친구들은 이미 미대에 원서를 내고 시험장까지 다녀온 후였다. 그리고 내 또래 친구들은 상반기에는 미술 학원에 나오지 않고 공부를 주로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미술 학원에 내 또래 친구는 보이지 않았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같이 그림을 배워야만 했다. 또 중간에 상황이 꼬여 기초를 미처 마치지 못하고 바로 실전에 투입되어 입시 그림을 그려야 했다. 당시 어렸던 때라 환경에 대한 탓도 많이 했고 나를 지킬 줄 몰라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던 그림은 어느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학습된 무기력으로 이젤 앞에만 앉으면 마음이 불안해졌고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나의 이 불안감과 싸워야만 했다. 내가 만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지금의 내가 과감하지 못하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성격이 되었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들어간 대학교는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동시에 꽤나 즐거웠다. 그리고 이젤 앞에만 앉으면 두려움과 싸워야만 했던 시간들도 작고 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니 꽤나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자신 없어하며 한숨을 푹푹 쉬지만. 그림 때문에 울고 웃던 시간을 보내고 성인이 된 나는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어렸을 때 꿈꿨던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고는 있지만 누군가 아직도 그림 그리는 게 좋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직장 동료에게 어렸을 때는 분명 좋아했는데 커서 보니 그림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직장 동료는 누군가와 자신을 계속해서 비교하며 그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어보았지만 여전히 내가 예전만큼 그림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림은 흐르는 대로 살던 내 삶에 큰 소용돌이를 만들어 나를 허우적대게 만들었고 때로는 열심히 헤엄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좋고 싫고를 떠나서 여전히 난 그 안에서 헤엄치며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