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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Dec 30. 2022

연말에 읽기 좋은 책 추천

최민석, <기차와 생맥주>


나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 그는 거의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목청껏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렇다고 뮤지션은 아니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지난 가을부터 커피 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격주 일요일 밤은 그가 특히나 더 분주한 눈빛으로 음악에 둘러싸여 있다. 다가오는 다음 주에 들을 플레이 리스트를 정하는 중요한 마감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집안일을 요청 혹은 지시하거나, 무의미한 장난을 치면 꽤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 누가 정해준 마감기한은 아니고 무려 10여 년 간 지켜오고 있는 스스로의 루틴이다. 이렇게 그가 엄선한 플레이 리스트의 100여 곡을 나도 늘 함께 듣는다. 집에서도 듣고, 가게에서도 듣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서도 듣는다.


그의 플레이 리스트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깜짝깜짝 놀란다. 바로 어제 발매된 BTS의 신곡에서부터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까지,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짜임새에 놀라며 여전히 그 노래들과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90년대 음악에 마음이 울렁거리고 당장이라도 노란 풍선(나는 젝스키스 팬이었다)을 흔들며 모든 추임새까지 따라 부를 준비가 되어있다. 곧 10대가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30대 부모 신분이지만 우리의 감성은 10대에 듣던 음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시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노인들 나잇값 못한다고 너무 욕하지 마. 나이 먹어봐라. 이렇게 나이 먹어도 신기하게 마음은 늙지 않더라."


나에게 청춘의 시계로 멈춰버린 기억 중 하나는 단연 '여행'이다. '여행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점을 열겠다고 마음먹은 후부터 자주 나의 여행들을 떠올렸고, 그 기억의 대부분은 이국의 낯선 길에 서 있던 20대의 과거에 다다랐다. 느린 기차를 타고 덜컹거리는 미대륙을 등줄기로 느꼈던 밤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게스트 하우스 앞에 앉아 달빛에 책을 읽던 새벽, 알 수 없는 언어이지만 짐작할 수 있는 사랑 노래를 들으며 그 나라 맥주를 홀짝거리던 오후 등. 그 기억들이 불현듯 나타나는 날에는 잠시나마 청년 여행자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단순한 그리움은 아니다. 그 순간만큼은 지금의 심장이 여행자의 팔딱거리는 심장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일상을 버티느라 굳어버린 내 몸 DNA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있는 그 기억들 덕분에 이렇게 에너지를 얻는다.


언제든 팔딱거리는 여행 DNA를 소환할 수 있도록 우리 부부는 자주 컴퓨터 화면에 세계지도를 펴놓고 여기저기 돌려보며 간접 여행을 한다. 로드뷰 지도를 켜서 저기 에메랄드빛 호숫가를 함께 산책하며 깔깔거린다. 불타는 고구마 같은 산봉우리를 보며 나란히 하이킹을 하다가 다리가 좀 아픈가 싶었는데, 이내 나의 두 다리는 그럴 리 없이 여기 우리 집 방구석에 고이 뻗어있음을 깨닫는다. 떠나고 싶다는 갈증이 몰려든다. 그럴 때 나는 여행책을 펼친다. 역시 일상의 제 자리, 우리 집 방구석에서도 여행자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의 여행기를 읽는 것이다. 그중 최민석 작가의 <기차와 생맥주>는 특히나 여행자의 심장을 빠르게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에는 '아, 여기에 가보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진 이미지 한 장 없고, 여행지에 대한 근사한 소개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많은 여행책 중 유독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여행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일까. 이국의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되는 생계형 작가의 업무적 고민들, 여행지에서 배우자와 나눈 현실 부부의 대화,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도시에 시큰둥해졌다는 솔직하고도 슬픈 고백, 공항의 생맥주를 마시며 여행을 마무리하는 의식 등, 여행지가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다. 그 모습에 비추어 비슷한 장면 속 내가 떠오르고, 그때와 다른 듯 하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나를 또 새롭게 만난다.


지금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나의 20대 여행도 흐릿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무엇을 떠올릴까. 옆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멜로디를 타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남편에게 <기차와 생맥주> 책의 한 페이지를 읽어주며 언젠가 같이 멕시코에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 책에 따르면, 멕시코에서는 택시 '문을 여는 순간 택시 안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음표가 와르르, 하고 쏟아져 내릴 것 같'으며, 빈 차를 타더라도 '언제나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먼저 탑승해 있'다고 하는데 나와 함께 그곳에 가보지 않겠냐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나의 고백이었다. 생의 마지막 페이지쯤 도착했을 때 자주 떠올릴 많은 여행들, 그리고 그 길의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나와 함께 있어달라는, 나의 사랑 고백이었다.


 아, 고백하기 좋은 연말이다. 그나저나 연말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야 했는데 고백을 추천하는 글을 쓴 것 같아서 마음이 아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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