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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빵집 변호사 Oct 23. 2017

스무 살, 오키나와, 그리고 하루키

1.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8월의 바다는 차가웠다. 햇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뜨거웠지만 그 아래 공기는 한겨울만큼이나 스산했다. 태어나서 마주한 그 어느 바다보다도 길고 맑은 물결이 펼쳐진 곳, 그러나 그 어느 장소보다도 사람의 발길이 배제된 곳. 내 첫 오키나와는 그런 느낌이었다.  


    두려움과 즐거움은 공존한다. 무턱대고 떠난 첫 여행이었다. 부모님도, 그 어느 타인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내 손으로 움직인 발걸음이었다. '혼자'라는 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렘을 물어다 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작음과 부족함을 느끼게 만들며 불안감 또한 몰고 온다. 신기한 단어다. 다만 이때의 나는 역시 설렘이 더 앞섰던 것 같다.  


    지쳤기에 쉬고 싶었다.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면 …. 10대 학창 시절 내내 들어온 말이다. 어른들의 입에서는 '다 할 수 있어'란 말이, 친구들의 입에서는 그에 부응하는 소망의 레퍼토리가 뒤를 이었다. 고대하던 실제 나의 스무 살은 도둑처럼 찾아왔고, 그 절반이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찾아온 나의 스무 살은, 그러나 닳도록 들어온 장밋빛의 환상은 결코 아니었다. 새로운 학업, 복잡해진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금전적 고민까지. 나는 말 그대로 방전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오키나와 섬을 한자 그대로 표기하면 충승도(沖繩島)가 된다. '비어있는 끈'의 섬. 오키나와를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단단히 조여 맨 줄 알았으나 텅하니 구멍이 나있는 끈의 이미지가 마치 그때의 나를 콕 집어 말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나는 하루키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 이름조차도 내게는 낯선 것이었다. 물론 그는 유명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 중학교 때에도 책을 잘 읽지 않는 아이조차 책상 위에 하루키 이름 세 자가 박힌 소설 한 두 권쯤은 올려놓곤 했다. <IQ84>나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상실의 시대> 정도가 기억이 난다.


    다만 10대 소년들이 하루키를 읽는 이유는 별게 없다. 유명하니까, 혹은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 글을 쓰니까. 조금만 성(性)적인 문장을 봐도 킬킬 웃는 10대 중반의 아이들에게 하루키 책을 펼치고 그렇고 그런 장면을 찾는 건 선생님들에게 혼나지 않으면서 지루한 시간을 죽이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내 기억 속 하루키는 딱 그 정도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하루키를 내가 여행의 동반자로 택한 것은 순전히 책의 표지 때문이었다. 혼자 떠나기로 결심한 오키나와, 말동무는 없을지라도 생각을 나눌 존재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출국 전날 서점을 찾았다. 그리고 그때 문학 코너에서 발견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마디로 '심플' 했다. 하얀색 바탕의 꺼풀에 투박하게 제목을 박아둔 채, 뭔지 모를 여러 색의 막대기가 놓인 표지는 단순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궁금증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한 존재감이었다. 


    우연 속의 인연 따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가 그런 책을 뽑아 든 것은 전혀 이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400p 짜리 책은 내 여행가방 속 한편을 차지한 채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 여행길에 그네들이 자랑하는 작가의 책 한 권 즈음 품고 가는 것은 멋들어진 일이지, 라는 소소한 생각과 함께.  




    4박 5일의 오키나와 여행은 들고 간 책 표지만큼이나 심플했다. 혼자서의 첫 여행과 새로운 나라라는 배경이 안겨다 주는 상쾌함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길을 못 찾아 헤매고, 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혼자서 끙끙거리고 두려워했던 일들도 하나의 즐거운 추억으로 새겨졌다. 


    하지만 거기에 내가 그리던 화려한 깨달음, 혹은 변화 따위는 없었다. 평소처럼 밥을 먹었고, 걸었고, 잠을 잤다. 떠나기 전의 나처럼, 그리고 귀국한 뒤의 나처럼. 유일하게 다른 점 하나는 다자키 쓰쿠루가 여행 내내 나의 곁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네 밤 동안 나는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들 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그와 나누었다.  


    쓰쿠루는 기묘한 사람이었다. 잔뜩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그래서 지루하지 않은 사람. 또한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 외로움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그의 '색채 없음'에서 비롯되었다. 책 속 그의 순례는 잃어버린 자신의 시간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 그 누구보다 가까이 지내던 네 친구들이 있었으나, 자신은 전혀 이유를 모르는 채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그 관계 전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는 절망한다. 


 '왜 하필 나야?' 


    공교롭게도 그룹 내 다섯 친구들 중 '이름'에 색채가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그뿐이었다고 한다. 그 색채 없음이 그에게서 모든 관계를 앗아가 버린 것일까. 이후 그는 이 일로 인한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심지어 우울증 때문에 죽음 문턱에 다다르기까지 했다. 


    그런 쓰쿠루가 자신을 그렇게 몰아넣었던 일의 진실을 마주하고자 중년의 아저씨가 된 뒤 네 가지 '색깔'의 친구들을 만나러 떠나는 길이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의 이야기이다. 상당히 흥미롭다. 여행에 걸맞은 책이네,라고 읽는 내내 생각했다. 

     



    꽤나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교실에서 스쳐 지나갔던 하루키를 생각하며 여행 중 가볍게 읽어나가고자 한 책이었지만, 그 정도로 가벼운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이유 없이 지치고 혼란스러운 기분에 처해있던 당시의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소중한 친구들에게서 버려진 쓰쿠루의 처지 - 그 공허함 - 가 비슷하게 느껴져서인지 나는 틈틈이 책을 펼칠 때마다 늘 진지해졌다.


    여름의 오키나와는 기대와 달리 한적했다. 북쪽으로 바닷가를 따라 쭉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그렇다. 진짜 날씨를 잊어버리고 쌀쌀함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이 적다. 길을 따라 어느 장소에 멈춰 서든, 그곳은 휴양을 즐길 수 있는 바다다. 그렇기에 한 곳마다 모여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내면의 생각이 깊어진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며 하루키를 읽었다. 쓰쿠루가 과거에 대한 답을 찾고자 순례를 떠난 것처럼, 나도 그를 따라 나를 돌아보는 순례를 떠난 기분이었다. 네 번의 밤이 지나는 동안, 나는 쓰쿠루를 떠났던 네 명의 친구들을 만났고, 오키나와의 바닷바람 속에서 그네들의 대화를 들었다. 


    하루키는 쓰쿠루에게 해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쓰쿠루는 네 친구들을 만나며 당시에 그가 알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을 듣는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찮다. 완전하지 못한 퍼즐 조각들이다. 그런 불완전함은 현재의 쓰쿠루, 즉 36세의 아저씨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작중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쓰쿠루는, 그리고 독자인 나는 그 대답을 볼 수 없었다. 하루키는 그것을 적어두지 않았다.


    바닷길을 따라 걷는 내 오키나와 여행의 종착지는 츄라우미 수족관이었다. 거기서 고래를 보았고, 차를 타고 공항까지 내려왔다. 쓰쿠루에게도 그랬듯 순례의 길에는 고민에 대한 아무런 해답이 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지난 시간들을 느리게 반추할 기회는 얻을 수 있었다. 그 행위가 특별함을 안겨다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스트레스는 사라지게 해주었다. 


   쓰쿠루는 그 자신의 무채(無債)가 자신과 다른 넷과의 '케미스트리'를 망쳤던 것은 아닌지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순례 길 위에서 그는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정작 모든 것을 뒤틀리게 만들었던 것은 이름 속 색깔 따위의 무의미한 겉에 집착하던 10대의 그들이 아니었을까. 20년간 서로에게 아픔을 안겨다 준 것은 그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된 현재의 쓰쿠루에게 해답은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여정은 그가 온전히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인도해 주었다. 다른 이들의 색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그와 대화를 나누던 나도,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온 뒤 다시 바쁜 일상의 바퀴가 굴러갔다. 한 달이 더 지나고서야 문득 오키나와에 대한 향수가 스며올라왔다. 인터넷을 켜고, 오키나와 네 글자를 초록 검색창에 입력해 본다. 사진 몇 장을 넘겨본 뒤, 백과사전란에 띄워진 오키나와에 대한 정보를 클릭한다. 떠나기 전에 보였던 충선도의 세 한자들이 눈에 띈다. 


    '沖'이라는 한자에는 '비어있다'는 의미 외에 '담백하다', 그리고 '따스하다'의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두 단어가 이제는 먼저 다가온다. 끈 사이 빈 구멍은 어쩌면 공허함이나 부족함이 아닌, 언제든지 지칠 때 뒤를 돌아 반추하는 순례를 허락하는 포근함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오키나와에 가고 싶다. 이번에는 상쾌한 마음으로 바다를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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