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여행을 다녀와서
세 번째 독서모임 멤버들과의 여행이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한옥'. 여행지는 안동.
그래도 모두 춘천 멤버들이라, 여행 전날 제주에서 서울 찍고 춘천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춘천에서 영주를 거쳐 안동에서 1박, 안동에서 대구터미널, 대구 국제공항을 거쳐 다시 제주, 그리고 집까지.
일정이 그렇게 짜였다.
휴우.
2박 3일 동안 전국을 뺑뺑 돌다 바다를 건너 다시 제주로 돌아와야 한다.
이번에도 멤버들과 책 3권을 읽고 미리 모임을 가졌다. 주제도 좋고 안동 하회마을도 돌아보고 한옥 숙소에서 잠도 자는 꽤 알찬 여행 계획이었다.
흠,
근데 문제는 두통이었다. 여행 이틀 전에 시작된 두통이 가라앉질 않았다. 태어나서 이런 두통은 처음이었다.
거북목에 라운드 숄더에 굽은 등에 등뼈의 골밀도까지 문제를 일으키더니, 이젠 두통까지. 최근에 하루 6시간씩 집중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심해졌다.
가방에 타이레놀을 몇 개 담고, 괜찮아질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즐겁지 않은 게 이상했다. 항상 웃고 기운 넘치는 30대, 40대 아들, 딸, 동생 같은 멤버들과의 여행이었으니까. 알아서 일정 짜고 운전해주고, 맛집 검색해서 데려다주고, 숙소 예약하고 경비도 계산해주는 풀코스 여행.
이번에도 난 , 민망하게도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이번 여행도 나름 맛있는 것도 먹고, 운 좋게 하루 500명 해설을 했다는 영주 부석사 해설사에게 우리 멤버들만 단독 해설을 듣는 행운도 누렸다.
숙소도 우리가 기대한 만큼 전통한옥은 아니었지만,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아픈 역사까지 가진 '고택'이 분명했고, 밤엔 뜨뜻한 아랫목에서 잠도 푹 잤다.
문제는 역시 두통이었다. 꽤 산발적으로 자주 일어났다. 경추성 두통이라 어차피 자세를 고쳐야 하겠지만, 일단 두통이 느껴지면 난 손에 들고 다니던 작은 물통의 물을 마셨다.
남편과 햄버거집에 들어갔다 받았던 귀여운 물통이었다. 작고 통통하고 귀여운데, 200ml나 들어간다 멤버들이 신기해했다.
근데.
제주부터 들고 다녔던 그 물통을 안동 하회마을에 들렀을 때 잃어버렸다.
"어, 내 물통!"
여행 내내 들고 다녔는데 허전했다. 물통이 없어지니 왠지 두통약이라도 잃어버린 듯, 두통이 더 심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행을 끝마치고, 대구 국제공항에서 30분이나 연착된 막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내렸다. 이미 집에 가는 버스는 끊어지고 남편이 1시간이나 운전을 해 날 데리러 왔다.
"재밌었어?"
"뭐... 재밌었지."
난 조수석에 앉아 피곤한 눈을 감았다.
두통은.... 참, 모든 걸 변화시켰다. 집중을 흐트러뜨렸고, 웃음을 짓기 힘들게 했고, 입까지 막아버렸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참, 한결같이 밝다고.
마음공부를 많이 해서 세상을 관조하는 힘과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가져서도 아니고, 해볼만큼 다해보고 누릴 만큼 다 누려보고 가질 만큼 다 가져서도 물론 아니고, 원래 느긋한 성격을 타고 나서도 아니었다.
두통을 겪고 보니, 내가 한결같이 밝은 건, 삶이 나에게 준 건강이라는 '행운' 덕분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여행 일정은 너무 빡빡했고, 몸은 점점 따라다니기 버거워, 여행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보던 참이었다.
까톡.
함께 여행을 다녀온 독서 멤버였다.
"꼬마 물병 보내요~."
"엉? 뭔 소리...?"
"오늘 도착 예정이래요. 혹시 택배나 문자 오면 시킨 적 없다 하실까 봐서요...^^ 여행 가실 때 하나씩 챙겨 가세요."
.... 무슨 물병을 보냈다는 말이지?
잠시 후. 까뭉이가 미친 듯 대문을 향해 짖었고. 삐걱, 대문을 열어본 내 눈엔 크고 작은 66개의 물통이 햇살 아래 놓여있었다. 흑, 감동의 눈물이 콸콸 쏟아지려 했다.
"웬 생수? 물 좋은 제주도에?"
히스토리를 모르는 남편이 생수병을 집에 들여놓으며 말했다.
"응. 우리 OO 씨가 나, 여행 갈 때 가지고 다니라고 보내줬어."
뿌듯한 목소리로 자랑 가득 담아 답했다.
선물로 받은 생수병 66개를 거실에 들여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같은 물병에 물을 계속 담아 먹는 게 안쓰러워서든, 잃어버리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너무 안쓰러워서든 내가 생각이 났다는 거다. 그리고 생수 물병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동했고, 쇼핑 사이트를 뒤졌고, 주소를 적었고, 결제를 했다는 거다.
고마웠다. 선물로 물을 받은 건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깨닫게 된 우리 여행의 '의미.'
그건 '사람'이었다.
난 멋진 걸 보러, 맛있는 걸 먹으러, 신나는 체험을 하러 그동안 세 번의 여행을 간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좋아서였다. 그들과 함께 웃고, 얘기하고, 잠을 자는 그 시간이 좋아서였다.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해서다.
생수 물통을 선물로 보내는 사려 깊고 따뜻한 멤버와,
자족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서도 '저 외로운 것 같아요'라고 솔직히 말하는 멤버와,
문제가 생기면 후딱 검색을 하고, 1번 2번 3번 대안을 쏟아내는 부지런한 멤버와,
힘든 일 겪고 이젠 재밌는 일은 뭐든 해본다며, 새벽 수영반에 가고 매주 산봉우리 찍는 씩씩한 멤버와,
그들과 여행을 하며, 마음을 나눠서다.
두통 왔다고 인상 잔뜩 찡그리고 다니다가, 생수 물통 선물 받았다고 금세 좋아 실실거리는 마누라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너, 뇌물 너무 좋아한다."
흐흐, 역시 30년 넘게 함께 살면 모르는 게 없다.
몰랐어? 나, 정말 뇌물 좋아해. 특히 이렇게 나 물 먹이는 뇌물은 더욱.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