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과 5군데 순례기
"무, 무슨 조직검사요?"
피부과 의사가 조직검사 하라는 말에 내 목소리 끝이 떨린다. 꽁꽁 묶여있던 몹쓸 단어들이 턱 풀려나와 머릿속을 마구 싸돌아다닌다.
조직검사라면... 혹시 피부암?
난 어느새 주사병 줄레줄레 매달고 항암 치료 중이다.
마음근력 키운다 매일 명상하고 불교철학책 뒤적이면 뭐 하나? 이렇게 창호지보다 더 얇은 마음이, 의사 말 한마디에 툭 찢어지고 마는데...
배에 사마귀가 창궐했다.
10년 전인가, 기억도 안나는 언제부턴가 배에 딱 점이 3개 있었다. 처음엔 점인 줄 알았다. 근데 1년도 안돼 내 배는 점박이가 됐다.
남편이 내 배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내가 죽일 놈이다!"
"?"
"마누라 배가 '사막화'(사마귀화) 된 줄도 모르고, 지구 환경이나 걱정하고 있었다니..."
"!"
마누라 배의 사마귀를 보고 지구 사막화를 생각해 내다니... 이게 창의적인 남편과 사는 맛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이미 유명하다는 다른 병원 피부과 전문의에게 '사마귀' 진단도 받았다. 친절한 의사와 20분 질의문답 시간도 충분히 가졌고. 만만찮은 레이저 비용 알아보려고 온 병원에서 조직검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의사에게 물었다.
"아니, 이거 사마귀 아니에요?"
"반반이요. 사마귀인지 검버섯인지."
잘해야 30대 후반의 젊은 여자 피부과 의사가 말을 툭 내뱉는다. 말투 하나로 사람 기분 순식간에 잡치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를 가졌다.
"검, 검버섯이요?"
"일주일 후 조직검사 하고 결과 보고 얘기하죠."
내 나이 아직 50대인데 검버섯이라니? 생각해보지도 못한 단어를 받아들이려 나의 뇌가 애를 쓴다. 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느 쪽이든 레이저 치료는 똑같지 않나요?"
"검버섯이면 위나 장에 문제 있을 수 있어요."
"저, 작년에 위 내시경도 하고 내장 초음파, 대장검사도 다 했는데요?"
의사가 날 빤히 쳐다보더니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거랑 달라요."
"....?"
"검사 먼저 하시고."
왕싸가지 바가지. 1시간 기다리고 3분 진료인데, 의사의 시선은 이미 날 떠난 지 오래다. 난 뭘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다 문을 닫고 나왔다.
이런. 씨... '사막화'된 배 때문에 속상한데, 그걸 이렇게 무심하게 방치해 둔 나에게도 화가 나 죽겠는데, 의사의 말투가 날 또 뒤집어놓는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얼굴 하얘져 진료실을 나온 나에게 물었다.
"뭐래?"
"검버섯일지도 모른다고 조직검사 하래."
"무슨... 걱정 마! 내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외국 논문 쏵 뒤져서 뭔지 확실히 알려줄게."
남편이 나름 대책을 제시한다. 심난해져 진료비를 내러 갔더니 간호사가 그런다.
"다음 주 예약되셨고, 진료비는 5,100원, 조직검사는 69,000원입니다. 결제 같이 하시겠어요?"
"왜 아직 하지도 않은 검사 비용을 먼저 내요?"
"미리 내면 편하시잖아요."
".... 누가요? 제가요?"
"...."
난 간호사의 낯짝을 빤히 쳐다본다. 황당한 의사에 황당한 간호사다.
일단 예약하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Y 피부과 가보자. 주말 내내 사마귀인지 검버섯인지 들여다보고, 일주일 내내 찝찝하게 있다 검사하고 또 일주일 피 말리며 결과 기다리고 싶지 않아."
제주에서 피부질환 잘 보는 걸로 유명한 Y피부과. 남편이 날 내려주고, 난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다행히 대기 손님이 없다. 바로 진료실에 들어가 배를 깠다. 반백 60대 의사가 내 배를 쓱 보더니 말한다.
"사마귀네."
"혹시.. 검버섯은 아니에요?"
두근두근.
"검버섯은 안 번지고, 이렇게 안 작아요."
"확실하죠?"
콩당콩당.
"확실해. 우린 레이저는 안 하니까 다른 병원 가서 제거하시고."
"네. 감사합니다."
후유.
진료비도 안 받는다 해서 그냥 병원을 나오는데, 그제야 숨이 쉬어진다.
분한 마음에 난 조수석에 앉아 집에 가는 내내 이를 갈며 두시렁댔다.
"모르면 모른다 해야지. 무슨 조직검사를 하래? 내 그럴 줄 알았어. 병원이 너무 삐까번쩍하더라, 자기도 봤지? 상담실이 몇개인지도 몰라, 호텔 프런트처럼 줄줄이 접수원들 앉아있고."
"..."
"완전 장삿속이 분명해. 병원 지을 때 분명 대출 엄청 받고 그거 뽕 뽑느라 병원비도 선납하라 하는 거야."
콧김을 쌕쌕 뿜으며 흥분한 나에게 현명한 남편이 한마디 한다.
"다 잘됐으니, 지나간 것 너무 곱씹지는 마."
'병원 시설이 호화롭다면 당연히 의사는 병원을 꾸미는 데 돈을 처발랐다는 뜻이고, 그 돈을 메꾸기 위해 환자의 건강과 재정 상태보다는 자기 호주머니 사정을 진료에 더 반영할 것이다.' <세이노의 가르침- 좋은 의사를 만나는 법>
지금은 다 지졌다. 다행히 친절하고 합리적인 가격의 다른 병원을 찾았고. 매일 아침저녁 배를 까고 소독하고 딱지 떨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다, 딱 내 레이더망에 걸린 까뭉이.
"까뭉아, 너 이리 와봐!"
겁보쫄보 눈치 백단 까뭉이는 벌렁 배부터 뒤집어 까고, 또 엄마가 자기에게 뭔 짓을 하려나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다리를 떤다.
"까뭉아, 너 배... 여기 이거 까만 거, 사마귀 아니야?"
"...?"
난 까뭉이 배를 가까이 들여다보고 까만 점 같은 걸 손가락으로 주르륵 비벼본다.
뭔가 밀린다.
... 때다.
"야. 넌 왜 이리 배에 때가 많냐?"
1년에 분기별 행사처럼 목욕시켜 놓고, 되려 보호자가 때 타령을 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휴우, 몇 주 동안 피부과 5곳 순례하고, 허구한 날 배 까고 들여다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버섯인지 마귀인지 그딴 건 좀 다 잊어버리고 얼른 일상으로 복귀하자! 난 옆에 세워둔 밀걸레 자루를 들고 마루의 먼지를 힘차게 밀어낸다. 남편이 옆을 지나가다 심각하게 나에게 주의를 준다.
"배 찢어진다. 그만해라!"
그래도 제법 고상한 대화도 주고받는 부부 사이인데... 요즘 나누는 대화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