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보다 더 큰 선물, 보스턴이 내게 남긴 것들
미국에서 글로벌 친구를 사귀게 된 이 여정의 시작은 나의 보스턴살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10년, 보스턴에서 보낸 17개월의 시간은 제 세계를 본격적으로 넓혀준 출발점이었습니다. 영어에 시간을 투자하고, 낯선 환경에 기꺼이 깊이 들어가 본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Ep1. 27시간 비행의 끝, 용감한 선택
- 영어보다 더 큰 선물, 보스턴이 내게 남긴 것들
1-1 내가 선택한 집
1-2. 브라질 이민자 가정
1-3. 영어 실력이 늘 수 밖에 없는 이유
1-4. 가족 같은 친밀감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
무려 27시간에 걸친 여정을 마치고 보스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표를 아껴보겠다고 젊은혈기 하나 믿고 미국 서부에서 스탑오버를 거쳐 왔던 장시간 비행으로 몸은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나가니 누가봐도 나를 데리러 온 외국인이 내 이름표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기사분은 긴 비행으로 지친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나보다 덩치가 더 큰 2개의 짐을 차에 실어 한 홈스테이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젊은 외국인 여성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싱글 여성이 혼자 살고 있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집 안은 어둡고 분위기도 왠지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삐걱거리 계단을 걸어 올라 내방이 있다는 2층으로 올라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나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는 걸까?’
홈스테이 환경에 대한 어떤 정보도 받지 못한채 배정받았다는 것도 아리송 했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습니다. 방에 들어가 3초를 고민하고, 1층으로 다시 내려가 기사분에게 말했습니다.
“저..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요.
다른 집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좀 더 밝고 가족이 여러 명 사는 집에서 지내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도, 무슨 배짱이었을까요.
동양에서 온 조그마한 친구가 영어로 자기 의견을 꺼내어 말하는 걸 잠시 차분히 듣더니 기사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아 통화가 잘 되었다는 웃음을 지은 기사분은 다시 내짐을 차에 싣었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가정집들이 많아보이는 동네로 차가 들어섰습니다. 새롭게 도착한 홈스테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살 집이구나’
홈스테이 주인과 딸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신발을 벗지 않고 바로 들어가는 미국스러운 가정집. 소파가 놓인 거실에 따뜻한 햇볕이 드는 주방, 마당이 보이는 창문, 그리고 환한 분위기의 내방까지.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이자 기사님도 안심한 듯 웃으며 돌아갔습니다.
내 첫 미국 집은 보스턴 오렌지 라인 근처, 브라질 이민자들이 터를 잡고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곳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브라질 문화를 접했습니다.
20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이제는 3대가 함께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가족이었습니다. 브라질맘은 나에게 자신이 어떻게 영어를 배웠는지 들려주었어요.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땐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어. 하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청소 일을 시작했지.”
굉장히 활달한 성격인 맘에게 하나 둘 청소를 맡기는 단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미국 고객 아주머니들과 조금씩 스몰토크와 대화를 나누며 단어를 습득하고 문장을 익혔다고 했어요. 그때 배웠던 표현중 하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며 저에게 가르쳐줍니다.
A pain in the neck
The guy is a pain in the neck!
“정말 보기 싫고 성가신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표현하면 돼“
어느 나라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떠는게 비슷하구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고 느꼈던 순간이에요.
브라질맘은 이제 작은 청소 회사를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에 건너와 처음에는 낯선 언어와 일을 버텨내며 시작했지만, 결국 성실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낸 맘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정신없이 살면서 언어를 몸으로 체득해 말 그대로 ‘생존영어’을 배웠다보니 맘은 읽고 쓰는 것이 약했어요. 그래서 지역 학교에 등록해 늦은 나이에 만학도로 열심히 영어로 공부하고 글쓰는 것까지 배우는 삶에 열정적인 브라질맘.
브라질에서 온 맘의 이야기는 저에게도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바로 20년 전 미국 고모부를 만나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제 핏줄인 미국 고모가요.
한국에서는 간호사로 자기 직업을 가진 여성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시 0부터 시작을 해야했던 고모.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자리 잡으며 아이들이 큰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열심히 삶을 꾸려오셨어요. 이렇게 행복하게 꿈꾸며 살고 싶다는 마음은.. 국적, 언어를 넘너 결국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민자로서, 혹은 처음 다른 나라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되는 소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라질 이민자 맘과 함께 살면서 저는 매일 조금씩 새로운 문화를 배워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브라질 음식과 음료를 접게하게 되었고,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간단한 인사말도 익히게 되었어요.
“Ola 올라” (안녕)
“Obrigada! 오브리가다” (감사합니다!)
“Boa noite! 보아노이치!” (잘자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브라질식 인사도 제 입에 자연스럽게 붙었어요. 만나면 항상 허그와 볼키스가 기본 인사인 문화이다 보니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법도 익히게 되었습니다. 영어를 배우러 왔지만, 매일 이렇게 다른 언어와 문화를 함께 접하면서 더 큰 세계로 마음이 열려갔어요.
이렇게 따뜻한 일상 속에서 영어 또한 점점 익숙해졌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 때 오가는 짧은 대화들, 청소나 빨래, 장보기할 때 주고받는 말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매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습니다.
주말이면 뒷마당 야외 테이블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잔잔하게 아침을 맞이했던 기억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브라질맘과 살면서 샐러드에도 소금을 듬뿍 뿌려 먹는 브라질 문화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어요.
특히나 브라질 이민자 가족이지만 미국 가정과 다를바 없기 때문에 이곳의 삶의 방식과 매너를 지키는 것에도 늘 신경 썼습니다.
화장실 바닥은 늘 드라이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바닥에 물이 묻어선 안되죠. 샤워커튼을 잘 사용하고 몸을 잘 닦고 나와야 합니다. 화장실의 향기도 중요하기 때문에 대왕 디퓨저가 항상 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가정에서는 대부분 수건 하나를 여러 차례 사용하고 빨래하는 편입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서 살때 매일 수건을 하나씩 사용하곤 했거든요. 대신 이곳의 수건은 큰수건(Big towel)에 가깝습니다. 이 큰 수건으로 몸을 말리고, 머리도 가볍게 닦고, 한번 사용한 수건을 자연스럽게 말려 다시 사용합니다.
이렇게 식사 스타일부터 화장실을 쓰는 방법, 수건을 사용하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워지만, 이 곳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매너를 지키며 언어와 문화를 함께 배워가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었어요.
보스턴 엄마는 참 한국 엄마 같았어요.
주말에 늦잠 자는 저를 깨울 때면 볼에 살짝 뽀뽀를 해주거나 엉덩이를 토닥이며 스윗하게 깨우는 진짜 엄마였어요. 결혼해 브라질로 건너간 자신의 첫째 딸이 나와 동갑이라서 그런지, 나를 더 살갑게 챙겨주었어요.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주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은 기억하고 일부러 남겨두었다가 점심 도시락으로 싸주곤 했습니다. 가끔 요리하기 싫은 주말에는 피자를 시켜주셨는데, 그때 처음 먹었던 도미노피자는 정말 충격 그자체였어요. ‘짠맛의 끝판왕’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실감했달까요. 근데 이상하게 그때 먹었던 그 피자맛이 한번씩 생각납니다.
주말이면 브라질 식당에 함께 외식하러 가거나, 맘 차를 타고 장을 보러 다녔습니다. 주중에 먹을 음식을 미리 사 두고, 날씨가 좋으면 피크닉도 가고, 더위를 식히러 바닷가와 수영장에 가고, 강가에 가서 낚시도 하고 노젓기도 하고, 가깝게 지내는 브라질리언 가족들과 모여 저녁 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가장 좋았던 순간은 저녁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 브라질리언 간식을 먹으며 브라질 막장드라마?!를 함께 보는게 작은 행복이었어요.
함께 산 시간이 5개월 남짓 짧았지만, 서로의 인생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깊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015년 미국 뉴욕에서 인턴 생활을 할 당시 다시 브라질맘과 재회했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저를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었어요. 예전에 쓰던 방을 기꺼이 내어서 하룻밤 자고 가도록 침실까지 살펴봐주고 맛있는 저녁까지 사주셨어요. 이렇게 정이 많은 엄마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니 우리는 할말이 정말 많았어요. 영어가 자연스러워진 나를 보면서 뿌듯하게 바라보는 맘.
가장 인상적였던 이야기는.. 2010년 당시 맘은 집을 고쳐서 세를 줄 계획이 있다고 자주 이야기했는데 5년 뒤 다시 만났을 때 그 꿈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실행력이 강한 엄마답게 지하층은 본인이 집으로 쓰고, 1층은 에어비앤비로 내놓았으며, 2층은 장기 세입자에게 빌려주고 있었습니다. 청소 회사도 여전히 운영하고 있었죠.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살았지만, 나를 딸로 생각해주었던 맘 덕분에 미국살이의 시작이 참 따뜻하게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