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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ro dodo XL Oct 14. 2020

아직도 너무나 생생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아름다움과 이불킥의 사이, 그 어딘가 존재하는 기억들 

 경상북도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났던 나는 모두가 그렇듯 8살이 되고 초등학교 -딩시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표준어 규정이  '-읍니다' 에서 '-습니다' 로 바뀌어 가던 시절이었으니 이미 30년이 넘도록 지났지만 아직도 나에겐 생생하게 남아있는 몇 가지의 기억들. 아련하고 아름답지만 한 켠으로는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억들이다. 


- 입학식 그리고 벨벳자켓과 자칼가방 


 입학식 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부모님이 입학식 첫날은 동행을 했었다. 엄마도 여느 엄마들이 그렇게 했듯이 예쁘게 차려입고 입학식에 동행했었고 첫 날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교실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었다. 지금도 되뇌이는 엄마의 혼잣말... 


 "참 미안해, 엄마가 생활비를 타서 쓰는 입장이라 옷이며 신발을 좋은 걸 사 줄수가 없었어.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척 아이들이 입는 '김민재 아동복' 옷을 한번 못 사입히고 좋은 운동화를 못 사입혀서..."


 나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리고 한번도 원망해 본 적 없는, 그런 부분에 엄마는 미안함을 가졌었나보다. 개구리가 풀잎을 물고 있는 앰블렘이 수 놓아진 김민재 아동복은 그 당시 소위 잘 나가는 집의 아이들이 입는 브랜드였나보다. 엄마는 그렇게 속이 상했었나보다. 친척들이 내려올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뻐근했었나보다. 큰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만큼은 그렇게 놔 둘 수 없었는지 엄마는 '김민재 아동복'의 벨벳 자켓을 사서 입혀 보냈었다. 


 솔직히 경상북도의 소도시 아이들은 아무도 그런 것을 입지 않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은 농사꾼들의 아이들이었고 그저 몸만 가리면 깨끗하기만 하면 되는, 주로 형이나 누나들에게서 물려입는 옷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굳이 그런 것 까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엄마는 내내 가지고 있었던 마음에 한을 풀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옷을 사서 입혔었다. 가방도 당시에 유명했던 브랜드 '자칼'에서 산 것을 메고 가도록 하셨다. 만화 주인공들이 박혀 있는 가방이 아니었다. 갖가지 색깔의 천들이 패치워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예쁜 가방, 지금 생각하면 정말 스타일리쉬한 녀석이었다. 



- "엄마, 국에다 밥 말아서 먹어도 돼...?"



 그렇게 한껏 빼 입고 갔던 입학식, 선생님의 성함도 얼굴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하지만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던 선생님의 목소리는 물 속에서 듣는 소리처럼 웅웅거렸었다. 첫 사회생활에 긴장한 탓이었을까. 8살의 남자아이는 그렇게 오전 수업을 끝내고 급식을 먹게 되었다. 정갈한 식판에 밥과 국, 그리고 반찬들이 놓여있는... 처음 받아보는 급식판도, 학교 교실의 내 자리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먹는 밥도 생소했다. 부모님들은 여전히 뒤에서 아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고 여전한 긴장감 속에서 한 술을 뜨는데 왠지 목이 막혔다. 그리고 이내 고민에 빠졌다. 


 '학교 급식은 국에 밥을 말아도 되는 걸까...?'

 '만약 내가 국에 밥을 말면, 선생님께 혼나지 않을까...?'


 첫 사회생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규율과 제도와 법칙이 존재하는 곳. 나는 알게 모르게 그런 압박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나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유일한 내 편은 엄마 뿐. 뒤에 서 계시는 엄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국에다 밥 말아서 먹어도 돼...?"


 별 일 아니지만, 사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밥에다 국을 말아서 먹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행위였겠지만, 처음 학교라는 곳에 몸을 던진 아이가 자기가 속한 사회의 규율과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가 행하기에는 아주 큰 일이었던듯 싶다. 엄마는 웃으며 


 "아휴, 그럼~ 괜찮고말고"


 나는 안도의 숨과 함께 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다 비웠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는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등교가 끝났다. 왜 그런지는 정말 모르겠다. 많고 많은 기억들 중, 대부분이 소실된 기억들 중 이 장면만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 정확하게 박혀 있다.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문제를 해결하고 안도감을 느꼈었기 때문일까? 분명한 건, 이 일을 떠올릴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왠지 눈물이 날 것 같다는 것. 아직 엄마에겐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왠지 이 일을 엄마에게 이야기 했다가는 전화하다 말고 눈믈을 흘릴 것만 같아서다. 


 지금은 훨씬 큰 사회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긴장감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뎌졌기 때문일까? 끝도 없이 나오는 배워야 할 것들의 연속인 이 세상에 신물이 났기 때문일까?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은 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겠지만, 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왠지 모를 용기가 난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일에 앞서서 몸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에 도움을 청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나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말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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