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7일 일기입니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말하는 ‘시절인연’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았다. 이게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끝이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어를 90년생인 내가 가져와 나와 주변 사람들의 보폭을 설명하는 과정에 땡겨쓰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운동에 모든 걸 쏟아붓겠습니다.”
요즘 많은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순간 나는 박수를 치면서도 그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를 생각하며 동시에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다짐한다. 모든 걸 쏟아붓는 건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학습해야 할 것은 [걸 만큼만 걸어보라는 것], 그래서 함께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비열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가늘고 길게 운동하고 싶다. 그래야만 이 판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여성들의 ‘첫판깨기’의 무한반복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 기준의 ‘가늘고 길게 운동하기’가 정작 그 정도의 값만을 갖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가늘고 길게 썼어도 나름대로 두껍게 남아버리는 것,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튼 그렇기에 나는 운동에 모든 걸 쏟아붓겠다는 말을 경계한다.
운동은 나, 우리의 관계, 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운동에 모두 온전히 투여해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에요.] 이게 이기적인건가? 모든 걸 걸어야 할 운동이라는 게 지금 청년세대에 소구력 있는 언어일까? [버텨내세요!!]라는 운동 방식이 한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하기 바쁜 청년들이 마주했던 일상과 대체 뭐가 다른 거지? 대안인가요? 결과가 다르니 다르다 말할 건가요?
페미니즘 정치는 뭘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여러 고민들이 난무한 가운데 우리가 함께 이야기 해야 할 것은,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거였다.
우리가 가진 불완전함을 인지하고 그렇기에 마주할 상황과 변화에 대해 함께 조응하는 개개인들의 합임을 인정하는 것. 그렇기에 출렁일 수 밖에 없는 작업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인지하는 것 말이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되 대신 맘껏 할 수 있도록 나와 우리를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