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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만 Feb 25. 2022

'반쪽' 투표권을 들고서 대통령을 뽑는 사람들

[혜민의 참깨와 함께⑫] 사회적 약자들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대선판



최근 <고양이 언어도 통역이 되나옹?>이라는 책을 봤다. 귀여운 책 제목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만 같았다. 참깨와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지난 지금, 내가 어느 정도 참깨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미묘한 차이들을 열심히 통역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내게 참깨가 다가올 때, 양치를 시키자 발버둥 칠 때, 빈 그릇 앞에서 나를 초롱초롱 바라볼 때, 각각의 상황에서 참깨가 내게 말했던 '애옹'은 모두 달랐다. 정확하게 해석되진 않으나 '애옹'의 높낮이, 꼬리의 흔드는 정도 등도 참고해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  귀여운 턱살 매력 참깨 ⓒ 조혜민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애정을 나누는 것은 세상을 촘촘하게 볼 수 있게 했는데, 이건 좋으면서도 나쁜 일이었다. 참깨의 집사가 된 이후 동물 학대 소식을 접할 때마다 눈을 질끔 감게 된다. 눈에 불을 켜고 보는 것처럼 상대의 언어를 알아가고, 삶을 알게 되는 순간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 참담하기 때문이다.



"작은 원이 TV 절반을 차지했으면 좋겠어"


10년 전, 처음으로 청각장애인 친구가 생겼던 난 그 친구 덕분에 세상 가장자리에 선 그 친구의 일상을 고민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는 TV화면의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원, 수어통역사를 가리켰다. 그리곤 "이게 TV 절반을 차지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부끄럽지만 그 친구가 말하기 전까진 고민해본 적이 없었고,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언어를 통역하기 시작한 내가 바라본 대선판은 그래서인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후보, 공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청각장애인과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다.


▲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난 21일 오후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관 티브이 토론회에 나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는 수어통역 화면.  ⓒ 문화방송


지금의 대선판은 TV화면 한 켠에 '어중간한' 원을 만들었다. 후보들의 TV토론회에서 아예 수어통역이 없거나 수어통역이 있더라도 수어통역사를 단 한 명 배치해 네 명인 후보들의 대화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지금, 도대체, 어느 후보 말을 통역하는지 확인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선관위는 효율성과 현실적인 문제를 들며 난색을 표하는 것에 그쳤다.


하지만 선관위에게 충분한 시간은 있었다. 이 같은 문제는 지난 19대 대선 당시에도 발생했었고, 당사자 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의 문제제기 끝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선거방송 화면 송출시 2인 이상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험난한 상황은 발달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선거공보물과 투표용지가 '글' 중심으로만 구성되다 보니 발달장애인은 정보를 이해하기 어렵고 투표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고 지적되어왔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에서도 '공직선거 후보자 및 정당은 장애인에게 후보자 및 정당에 관한 정보를 장애인 아닌 사람과 동등한 정도의 수준으로 전달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보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선거공보물을 제작하고, 그림·사진을 활용한 투표용지를 도입해 '제발 참정권 좀 보장해달라'는 당사자들의 기자회견이 최근에도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들의 삶을 통역한 법이 있고, 해외의 사례들도 있지만 선관위를 비롯해 정당들 역시 반응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제대로 된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참담하게도 이들은 '반쪽짜리' 투표권만을 들고서 투표장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게 해달라


"출근길, 지하철을 탑니다." 최근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시위에 나선 장애인단체가 선전전에 내건 문장이다. 더 많은 것을 달라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전부인, 뼈아픈 문장이다.


너무나도 평범한  말이 누군가는 이루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정치와 정부의 책임을 요구하는 . 이것이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역할이지 않을까. 누구든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온전히 투표권을 행사할  있도록 말이다.


( 글은 2022 2 25,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통해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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