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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오십 홀로서기 Mar 25. 2020

막내는 그래도 돼

세 남매의 막내, 막내는 사랑받았다

내 위로 오빠, 언니가 있다. 우리는 세 남매다.

첫째인 오빠하고는 네 살, 둘째인 언니 하고는 두 살 터울이다. 나는 오빠와 언니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왜 좋아하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정말 밤새 쉬지 않고 이유를 댈 수 있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우리가 세 남매이기에 과자를 사 올 때 똑같은 종류의 과자를 세 개를 사 오셨다. 공평하게 하나씩 먹으라고. 하지만 항상 내것은 없었다. 아껴뒀다 먹으려고 한 내 과자는 언니, 오빠가 먹고 싶으면  당연히 먹을 수 있는 비상식량이었다. 정작 나는 언니 오빠 과자에 손도 대지 못하고 벌벌 떨었는데 내 것을 당연히 뺏는 그들이 미웠다.


또 항상 나는 괴롭힘의 대상이었고, 잘못은 모두 내 탓이었다. 세 남매가 같이 사용하는 컴퓨터가 고장 나면 그전부터 상태가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막내인 내가 사용하다 고장 났으면 다 내 탓이었고, 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끄고 도망갔다.


예전에 한동안은 집에서 '셔터맨'이라 불렸다. 동생이라면 한 번씩은 당해봤을 것으로 언니 오빠가 자신의 방 전등을 끄기 귀찮아 다급하게 동생의 이름을 불러 방으로 오게 한 다음 전등불을 끄고 가라고 하는 행동. 어느 순간부터는 언니 오빠의 그러한 행동이 익숙해져 내가 끄러 다녔고 난 우리 집 셔터맨이 되었다.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우리는 10대 시절 매일 싸웠다. 특히 자매인 언니 하고는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지기 일수였다. 내 인생의 첫 싸대기를 언니한테 맞았다. 언니와 내가 싸울 때마다 오빠가 우리를 중재했고 감정이 상해 한동안 말하지 않다가 금방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은 자매가 되었다.


안 좋은 기억도 많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던 우리는 20년 가까이 살을 부대끼고 살다 오빠가 집을 나가고 나도 집을 나가면서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었고, 각자 책임질 일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더 이상 몸싸움을 하지도 않고 과자의 소유권을 두고 싸우지 않게 되었다.




형제가 많으면 서로 도울 수 있기에 좋다고 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함께 있을 시간도 없는데 무슨 도움? 내가 그들의 덕을 보는 일이 과연 생길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어렸을 때에도 싸우기만 했지 서로의 우애를 확인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타향살이를 하며 난 누구보다도 막내로서 형제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되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오래전부터 오빠 언니는 나에게 형제의 사랑을 많이 주었다.


내가 사회생활 시작과 함께 타향에서 자취를 준비할 때 언니 오빠는 이미 사회인이었다. 서울로 혼자 올라올 때 난 돈이 없었다. 집안 형편상 아무도 나의 자취를 지원해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서울로 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집, 생활비 등 온전히 혼자 해결해 나가야 했다.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서울에서 처음 혼자 집을 보러 가던 날 오빠는 선뜻 먼저 같이 가준다고 했다. 차가 많은 곳에서 운전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오빠는 나를 위해 서울 온 동네를 누비며 며칠동앙 함께 집을 보러 다녀주었다. 오빠가 일때문에 더 이상 함께 집을 보러 다닐 수 없게 된 마지막 날 오빠는 그랬다 “부동산 중개사한테 목소리 크게 하고 기죽지 마” 집을 보러 다니는 내내 오빠가 나를 대신해 공인중개사와 대화하고 조율했다. 아직 사회경험도 없던 내가, 오빠는 못믿어웠고 걱정이 많이 되었나 보다. 싫은 소리 없이 그 외로운 길 시작에 오빠가 함께 해주어 고마웠고 그 마음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집을 구했다. 어렵사리 구한 집에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던 날, 와달라는 말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언니는 휴일에 서울로 올라와 짐을 함께 정리해주었다. 생필품을 사러 간 마트에서 언니는 내가 쓸 것이니 다 사주었다. 기대 없던 언니의 방문과 선물에 고마웠다. 인턴에서 정규직이 되기 전까지 내 생활비는 항상 빠듯했기에.


내 자취생활의 준비는 온전히 혼자 했다 할 수 없었다. 내가 힘든 순간 언니와 오빠는 항상 도와주었다. 경제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막내니까 괜찮아. 막내이기에 나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살아온 언니 오빠가 항상 옆에 있어주었기에 난 괜찮았다. 지금도 힘든 일이 있으면 부모님이 아닌 그들을 찾는다.


요즘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건 그토록 미웠고 싸우기만 했던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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