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합류할 때는 단순히 외국에 본사가 있는 글로벌 스타트업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다. 초기 스타트업에 합류하는 것의 의미도, 스톡옵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단지 커리어적인 성장만을 염두에 두었던 결정이었다.
입사하고 나서야 스톡옵션 제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1년 클리프, 4년 베스팅 조건이었다. 쉽게 말하면 입사 후 1년 후부터 스톡옵션 적립이 시작되고, 4년간 적립되어 총 5년 이상 재직해야 전액 행사가 가능한 조건이었다.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스톡옵션으로 엑싯에 성공한 창업가들의 이야기가 세간에 떠돌기는 했으나 나와는 너무 먼 얘기로 느껴졌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회사가 생존할지도, 내가 계속 다닐지도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 회사도 스타트업이었고 1년 만에 이직했던 터라직원들의 동기 부여 수단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이 99.9%라고 보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렇게 스톡옵션 따위는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회사에서 carta 계정을 만들라는 요청이 왔다. carta는 주주 관리를 돕는 미국의 핀테크 스타트업인데, 여기에 가입을 하고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주식이 쌓이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1년 클리프 기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베스팅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위기가 찾아와 구조조정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잔류하게 된 팀원들에 대해 회사는 추가적인 스톡옵션을 부여했다. 1년 클리프는 동일하나 3년 베스팅 조건으로 조금 더 후한 조건이었다.
이때까지도 스톡옵션은 나에게 중요한 고려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나 역시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최종 면접까지 합격한 곳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냥 남기로 결정하여결과적으로내가 받은 스톡옵션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 회사는 구조조정의 파고를 딛고 조금씩 안정되어 갔고,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놀랍게도 본사에서 IPO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베스팅된 스톡옵션에 대해 조기 행사(early exercise)와 주식 매수(tender offer) 옵션을 제시했다. 조기 행사는 베스팅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미리 미래의 몫까지 당겨서 스톡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고, 주식 매수는 이 중 일부를 회사에 매수 청구를 할 수 있는, 즉 바로 주식을 현금화할 수 있는 권리였다.
와, 뭐지? 이게 정말 된다고? 기쁨 반 놀람 반으로 본사에서 온 이메일을 정독하던 나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외국 블로그와 웹사이트들을 뒤지며 실제 유사한 케이스의 경험이나 조언을 찾아 헤맸다. 스톡 옵션 행사 시 세금 이슈부터 시작해서 미래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 결부되는 결정이고, 심지어 본사가 외국에 있다 보니 복잡도가 더 높아서 국내에서는 비슷한 케이스가 많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전액 조기 행사(early execise)를 선택하고, 주식 매수(tender offer)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개인적 재무 상황
우선 스톡옵션 행사에 필요한 비용은 당시 내 재무 상황에서 무리하게 큰 돈은 아니었고, 비용은 고정되어 있는데 이익의 상한선은 제한이 없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의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전액 조기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주식 매수에 참여할지는 조금 더 고민을 오래 했다. 당시 주식 매수를 통해 바로 현금화가 가능한 금액은몇천만 원 정도였다. 이 돈이 나에게 당장 큰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에게는 나름 투자 겸 실거주지로 신중하게 고려한 부동산도 있었고, 부채도 감당 가능한 수준에 이자율도 낮아서 상환 시의 이점이 크지 않았고, 주식 투자를 하긴 했지만 당장 목돈을 추가 투입할 정도로 확신이 있는 종목이나 섹터는 없었다.
2. 주식의 미래 가치
회사가 제시한 주식 매수 가격은 꽤나 매력적인 수준이었으나, 정말로 상장하게 된다면 그보다 업사이드가 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회사가 글로벌 시장에서 좋은 레퍼런스를 쌓으며 성장해나가고 있었기에 이 전략이 지속되었을 때 앞으로 더 확장할 수 있는 파이가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장기근속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언제라도 더 나은 커리어를 위해 떠날 생각이 있었던) 내가 5년간 한 회사를 다니면서, 그간 여러 가지 위기 상황에도 나름대로 잘 대처하며 꾸준히 성장을 지속해 온 조직 문화와 리더십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 2021년이었다. 코로나 이후 펼쳐진 유동성 장세로 전 세계 자산 시장이 뜨거웠던, 그리고 스타트업계에는 환희의 끝자락이었던 시기.
이 글을 쓰는 2024년 10월 현재, 내 스톡옵션은 아직도 휴지조각과 일확천금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스톡옵션을 행사는 했지만, 주식 매수에는 참여하지 않아 결론적으로는 스톡 옵션 행사에 돈만 들이고 아직 투자금 회수는 하지 못했다. 회사의 IPO는 가시화되는 듯하다가 슬그머니 미뤄졌고, 현재는 기약이 없는 상태다.
2021년 이후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기를 거치며 SVB의 파산과 같은 충격적인 소식이 이어졌고, 스타트업계에는 급격하게 겨울이 찾아왔다. 나는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제3자의 입장에서 그 회사를 먼발치에서 응원하는 외부인이 되었다. 내부정보에 대한 접근권도 사라졌고, 언론에서 공개하는 내용 이외에는 전혀 모르기에 미래 가치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전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고민과 결정을 통해 초기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의 또 다른 의미와 스톡옵션의 가치, 미래의 재무 계획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더 넓은 시각에서 내 일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일과 투자의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참고로 그 이후 이직한 다른 회사 역시 초기 스타트업이다. 이번에는 합류 과정에서 스톡옵션을 자연스럽게 먼저 논의했고, 협의 하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은 99.9%라고 생각하지만, 0.1%의 가능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경험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