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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26. 2024

느림

밀란 쿤데라

p8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빠른) 속도를 엑스터시의 형태로, 즉 현대 기술혁명으로 인한 욕망의 지향점으로 본다면 느린 속도는 결핍이다. 결여된 속도로서의 느림은 불만족스럽고 지루한 '빈둥거림'이다. 이는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는 '한가로움'과 사뭇 다르다. '한가로움'은 속도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순간을 향유하는 것이고, '빈둥거림'은 빠른 속도라는 엑스터시에 취해 무언가 행하지 않으면 금단증세에 시달리는 산업화 이후의 시간 개념인 것이다.

'한가로움'과 '빈둥거림'의 대조는 '기사'의 사랑과 춤꾼'의 사랑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젊은 기사는 후작부인과 황홀한 밤을 보낸다. 후작부인이 남편에게 진짜 정부를 숨기기 위한 연막작전으로 그를 유혹했다는 진실에 실망하는 것도 잠시, 간계인지, 낭만인지 의심하기를 그만두고 지난밤의 여운에 젖는다. 이와 반대로 춤꾼은 '대중'이라는 추상 앞에서 숨 가쁘게 꾸며댄 시나리오를 소유할 뿐이다. 춤꾼에게는 사랑도 대중에게 선보일만한 에피소드다. 어떤 도착적 이미지를 사랑의 은유인 척 대사를 짜고 새로이 각색하여 전시하느라 여념이 없다.

서로 다른 시대의 춤꾼과 기사는 하룻밤을 보내고 성 밖으로 나서다 마주친다. 뒤틀린 시간 속 기이한 교차점이다. 기사는 지나간 시간의 향기를 맡으며 마차에 오르고, 춤꾼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그는 상상 속의 대중에게 남성성을 과시하다 육체의 감각을 잊었다는 것을, 잊으려 기계의 속도감에 자신을 내맡긴다.



p151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혔으며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시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보하라 명하고 대중의 시선을 투과시켜 인간의 내면까지 투명하게 전시해 동일성의 세계에 가둘 때 삶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 달리는 차 안에서 빛나는 조약돌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수줍은 벽 안에서 잉태되는 한 인간의 사유는 번쩍이는 네온사인처럼 신속하고 일시적인 착란으로 대체되고, 분주한 인간만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스쳐가는 창 밖으로 영감을 훔쳐댄다. 오래도록 무르익혀야 하는 경험은 체험의 분절로 전락하고, 인간은 왜 모든 순간이 드라마가 아닌지 궁금해한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 아래 조약돌은 여전히 빛나는데, 삶은 빨간 구두를 신고 시끌벅적하게 춤춘다. 그러나



내일은 없다.
청중도 없다.

제발, 친구여, 행복하게나.

p176


느림은 움직임의 결여가 아니라
삶에 깃든 신을 보는 창문이다.
실체 없는 대중의 시선, 그 속박에서 벗어나
광활한 어둠과 우주의 포효, 멜로디 없는 음악과 말 없는 대화 속에서 추는 춤이 진짜다.

춤을 추고 싶다면 춤꾼이 되지 말 것.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를 것.
그것이 느림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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