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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26. 20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읽다가-

어렸을 적 삶은 전투의 연속이었다. 현실에 주어진 모든 것을 미워하고, 이상화된 곳을 향해 애써 달리다가 쉽게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타인의 이상은 나를 개선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배제해 비존재의 경계에 던져 놓았다.


나는 욕망의 진자운동(펜듈럼)에 갇혀 있었다. 옳고 그름, 우와 열, 안과 밖을 가르며 통제와 분노를 오가는 것은 '키치'의 생리다. '키치'는 순수한 미학적 이상으로,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의 영역 밖으로 추방한다.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부정하기 위해 죽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를 두고 '키치'를 지키려는 '형이상학적 죽음'이라고 했다.


'키치'의 세계에서는 이상을 추구하거나, 이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키치'의 베일을 벗으면, 무한한 가능태의 세계가 열린다.


결함도 이해의 통로가 된다. 다소 순진하기까지 한 솔직함과 무모함, 회의하는 습관 같은 나의 결함은 빛나는 개성으로 변모한다. 질병으로 정의되던 결함이 삶을 고양시킬 때 니체는 이를 '위대한 건강'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건강의 관점에서 노예도덕이 부여한 결함의 기준은 해체되고, 삶은 어린아이처럼 춤춘다.


춤추는 삶은 가벼움일까 무거움일까. 찰나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의 세계관에서 가벼움은 공허의 짐을 지고, 무거움은 슬픔의 형식에 행복의 내용을 지닌다. 토마시는 6번의 가벼운 우연 끝에 테레자를 만나 단 한 번의 은유로 그녀를 사랑했고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이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 내면의 목소리는 기존의 나를 죽이는, 그로써 나를 해방시키는 충동이자, 진정 나를 자유롭게 하는 단 하나의 무거운 의무였다.


어렴풋한 석양 아래에서 귀를 기울인다.

빈자리가 공허하지 않냐고 사념이 묻는다.


빈 것은 어디있고, 공허는 어디있지?

내면의 희붐한 빛이 어둠에 실금을 그었다.


새벽을 열어. 그래야만 해.

빛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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