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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Nov 18. 2024

욕망에 대하여

<법정의 얼굴들>을 읽으며

요즘 나는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열정을 쏟아부은 자리에 구멍이 나고, 잃은 적이 없는 것을 그리워하며 만나게 된 것은 나였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지

내가 뭘 기대했지

내가 뭘 원했지


"인간의 욕망이 그의 운명이다"(티베트 사자의 서, p44) 무의식적인 욕망의 메커니즘 속에서 반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뜻이다. 삶의 지도를 그리는 것은 욕망, 그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실현해 가는 것이 인간이다. 다시 말해 나의 삶은 내가 어떤 욕망을 가지느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느냐, 어떤 반응을 선택했느냐에 따른 결과물이다.


하지만 욕망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미지가 너무 많다. 비슷비슷한 이미지 속에서 조금 더 재밌고, 조금 더 공감이 가고, 조금 더 감각적인 콘텐츠는 있지만 순간의 '동감'을 일으킬 뿐 금방 사라진다. '맞아 맞아'의 동감은 아기가 엄마를 흉내 내는 기쁨이고, 출처모를 자기 계발 글귀는 아버지의 법을 대체한다. SNS는 글귀와 이미지를 통제하는 권력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분열증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경한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다만 강렬한 동질감으로 순간의 입장을 고수한다.


강박적인 세계에서는 인쇄술을 독점하는 출판사와 브라운관을 독점하는 언론사가 헤게모니를 만들었다. 하나의 기준이 지식층을 사로잡으면 균일한 시선을 양산하여 강박적으로 삶을 끼워 맞췄다. 억압이 강하다 보니 거기서 소외된 욕망은 공격성을 배태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인지한 개인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거나(인간실격, 상실의 시대, 수레바퀴 아래서), 방황하거나(개밥바라기별,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영적인 세계에서 답을 찾았다(파울로 코엘료, 괴테, 톨스토이, 빅터프랭클).


분열증적 세계에서 인간은 소외된 욕망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소외됐다, 싶으면 다른 게시물에서 '맞아 맞아' 외치면 되고, 억압한다, 싶으면 OTT의 서사나 마음 챙김 명상 속으로 숨어들면 된다. 알고리즘과 넛지 홍보전략이 스며들면 나의 욕망이 세계에 부침 없이 정착했다 믿으며 손뼉 치면 된다.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은 이를 긍정사회라고 말했다. 하지만 완벽한 긍정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인간은 욕망의 지도로 세계와 타인을 이해하므로, 그 이해에는 언제나 결여가 있다. 즉, 인간의 환상과는 별개로, 삶에는 부정성이 있다. 인간이 아름답다고 규정한 광경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광적으로 손뼉 쳐도(전체주의 키치), 인간은 똥을 싸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도망치듯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다. 그래서 영원한 긍정은 존재할 수 없는데, 특히 어떤 욕망에도 정주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무수한 게시물로 얼기설기 조합한 타인의 욕망으로 숨 가쁘게 만족과 불만족의 진자운동을 하며 살아간다.


영원히 얕은 만족의 섬을 옮겨 다닐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간극마다 찾아오는 권태, 허무, 불안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만족을 취할 대상을 찾지 못해 느끼는 권태, 허무, 불안의 감정은 마음의 구멍이다. 마음의 구멍은 욕망이 몸을 숨긴 자리이다. 구멍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 웅크린 욕망을 깨우면 날갯짓만 바쁜 나방처럼 여기저기 부딪치며 불씨를 옮긴다. 지나간 자리마다 고통스럽다. 이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내가 무엇을 기대했는가,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단 한 명의 청자가 되어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것은 복잡다단한 인간 존재에 대한 문해력을 갖추는 일이다. 나의 세계가 빈약하면 타인을 보는 눈도 단순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얼굴을 한, 삶에서 깨지고도 희망을 잃지 않는, 가까운 사람들이 내던지는 빈약한 이해에 굴하지 않고 내면의 빛을 지키려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의 글을 읽는다. 비슷한 이미지들 속에서 더 매끈한 생각과 미모의 우열을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지 뒤에 숨은 고유한 인간을 보고 싶다.

나의 욕망을 마주한다.
단 한 명의 청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조금 더 욕심낸다면, 단 한 명의 청자를 찾고 싶은 욕망이 있다.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27)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단 한 명의 진지한 청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61) 나는 내 사랑에 구속되지만 당신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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