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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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모른 채 쏟아지는 광경에 발아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가만히 있자.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고 좋은 하루 보내라 인사하고 문 앞으로 나가 배웅하자.
서운한 사람 없게, 서글픈 사람 없게, 자꾸만 미운 오해와 슬픈 착각에 빠지다가 그것이 진실이 되어버린 사람들 곁에서,
마치 어제처럼,
그런 밤들이 모여 마침내 내가 밤이 되어 버리면
조각난 아침에 다시,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이 알아서 내일이 되고, 오늘이 되고, 어제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되어 있을 것이다.
생각은 소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나를 가두지 않기를 바란다.
붙들지 않아도 내일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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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19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 없이 연장되고 있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다.
37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동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131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
그 시공간이 일상적으로 떠먹여 주는 무기력을 더는 삼킬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다른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다.
166 신이 영원에 가깝도록 침묵할 때,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이 해볼 수 있는 것이 정치다. 그래서 정치는 인간의 자력 구제 행위다.
168 신이 침묵하고, 정치인들이 무책임하고, 그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거세된 시대에, 이민을 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 공적인 시민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168 21세기 공화국의 시민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투표예 참여하는 시민군이다.
280 지식이 지식의 소유자에게 가져다주는 보다 깊은 신비는 바로 지식이 그와 대상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280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냉정한` 지식을 획득했을 경우, 그 지식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그 대상이 우리를 홀리는 힘을 벗어나 그 대상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역으로 말하여, 우리가 어떤 대상의 마력에 홀릴 때는 그 대상에 대하여 무지한 경우가 많다.
292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