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스웨덴 한림원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이유로 밝힌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의 대표적인 예시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였던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이다.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언급했듯이 마치 시간이동 라디오에 의지해 디지털시계를 1980.5.18로 맞추고 그때 그곳으로 실제 들어가 모든 상황을 직접 보고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그러다보니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무척 고통스럽다. 5.18 희생자, 생존자, 유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방사능 피폭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그 어떤 서사보다 아프게 전달하는 작품이다.
첫 도입부부터 아련하다.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 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p.7)
첫 페이지를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었다. '너'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독백과 외부자의 서술이 교차한다. <소년이 온다>는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 옴니버스 구성이다. 큰 틀에서 구조를 알지 못하면 헤맬 수 있다. '너' '당신' 나' 인칭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자칫 길을 잃는다. 한참 뒤로 가서야 '너'가 '동호'임이 드러난다. "비가 올 것 같"고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라는 동호의 혼잣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인한 걱정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읽힌다.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문장이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이니 두 작품은 '비'에서 '눈'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고심 끝에 첫 문장으로 '비가 올 것 같아'를 썼을 작가의 마음을 조용히 짐작해 본다.
1장 '어린 새' : 소년 동호의 이야기
시신들 앞에 촛불을 밝히고 유족들의 확인을 돕는 과정에서 동호의 내면에 계속 질문이 생긴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예전에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켰을 당시,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 나갔"고, 이후 "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멍하게 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 이 또한 궁금하다. 그렇구나. '어린 새'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 몸에서 빠져나온 혼을 지칭하는 말이겠구나. 졸지에 몸을 잃은 어린 새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동호의 질문이 독자에게도 이어진다.
2장 '검은 숨' : 정대의 혼
'어린 새'로 상징되는 '혼'이 2장에서는 '나'라는 1인칭 화자가 되어 자신의 죽은 몸과 겹겹이 열십자로 포개져 곡물자루처럼 트럭에 실려가는 수많은 주검들을 바라본다. 정대는 '혼'으로만 느낄 수 있는 직감으로 '동호'는 아직 살아있고, '정미 누나'는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생각하며 묻고 또 묻는다.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쏘라고 명령한 수괴는 천수를 누리다 갔다. 죽은 혼들의 절규가 참으로 가슴 아프다.
베일에 싸인 실종자들의 행방,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진혼곡을 연주하듯, 작가의 묘사가 슬프고도 담담하게 이어진다. 독자 역시 동호의 '혼'을 따라 이동하며 함께 바라보고, 분노하고, 아파하게 된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수많은 실종자들의 행방, 화장해서 유골을 암매장했다는 군인들의 양심선언 등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반영된 듯하다. 그동안 '몸이 끌어당기는 인력' 때문에 죽은 몸 근처에서 떠나지 못했던 동호의 '혼'이 활활 타버리는 몸을 보며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치욕스러운 몸' 따위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참 슬프다.
열여섯 살, 인생의 가장 빛나야 할 꽃봉오리 같은 몸이 썩어가고 불타 없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다니. "우리들의 몸은 계속 불꽃을 뿜으며 타들어갔어. 장기들이 끓으며 오그라들었어. 간헐적으로 쉭쉭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우리들의 썩은 몸이 내쉬는 숨 같았어."라는 대목에서 '검은 숨'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죽은 자들이 태워지면서 내쉬는 검은 연기 같은 숨, 그 참혹하고 폭력적인 현장을 증언하는 영혼의 숨결이다.
3장 일곱 개의 뺨 : 은숙의 이야기
인상착의가 너무도 평범해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평범한 회사의 주임이나 과장처럼 보였을" 사내가 은숙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고, 연거푸 일곱 대의 뺨을 날린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악은 타인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던 말이 맞는 듯하다.
은숙이 80년 6월 즈음에 전남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분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도청 민원실에 전화해 항의하는 장면은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던 도청 앞 광장을 깨끗이 씻어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과거는 잊어야 한다는 듯이,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서 분수대에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을 은숙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고3 학생이었지만, 어른들보다 더 어른스러운 인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애도하지 않고, 제대로 진상을 밝히지도 못하고 모두가 쉬쉬하며 은폐하기 바빴던 시절에 대한 저항이다.
독재시절의 검문검색, 검열과 삭제, 민주주의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번역 출간하려던 희곡집은 군 보안기관의 검열관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페이지마다 먹줄을 긋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잉크에 담근 롤러로 페이지 전체를 검게 지워"놓은 곳도 있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암흑기다. 은숙은 지워진 페이지 사이사이로 살아남은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그 문장들이 지금 그녀의 삶과 시대를 그대로 말해주는 듯하다.
인생에서 가장 꽃다운 나이, 스물네 살의 은숙은 화장도 하지 않고, 굽이 있는 구두도 신지 않고, 남자 친구도 사귀지 않는다. 근무가 끝나면 조용히 자취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찬밥을 말아먹고 잠을 잔다. 허기가 지고 음식 앞에 입맛이 생기는 것조차 치욕스러워할 만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 하루하루가 햇빛 없는 저녁 같은 삶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을 좀 더 꾸미고 '사랑스럽기를' 기대하지만, 은숙은 "자신이 빨리 늙기를"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한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
'군중의 도덕성'에 대한 설명 중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라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떤 군중은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지만, 또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 하는데 이는 현장을 지배하는 특정 '윤리적 파동'과 연관이 있다는 설명이다. 탄핵 촉구 시위를 하다가 주변 쓰레기를 모두 정리하고 가는 '군중'과 다른 나라의 일부 시위에서 마트를 털고 차와 상점을 방화하는 '군중'의 차이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은숙이 던지는 질문,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은숙이 5.18을 겪으며 인간을 믿지 않게 된 것처럼, 한강 작가 역시 수많은 사례들을 조사하고 취재하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잃었다"라고 했었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썼으리라.
희곡집은 출간되지 못했지만, 연극은 무대에 올랐다. 사복경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우들이 삭제된 문장을 입모양만으로 달싹이며 전달한다. 그 대사는 어쩌면 <소년이 온다>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싶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p.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p.100)
4장 쇠와 피 : 교대생, 진수, 영재의 이야기
역사상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고문이 자행되어 왔다. 고문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다. 평범한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잘못 사용될 때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한 고문 도구가 될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더불어, 한 줌의 밥과 멀건 국, 김치 몇 조각을 2인 1조로 먹게 하고, 배고픔이 서서히 혼을 빨아들이고, 마침내, 동지였던 서로를 증오하게 만드는 고문관들의 악랄함에 치가 떨린다. 진수는 자신의 외모 때문에 더 끔찍한 일도 겪었다. 그가 훗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18 통계를 보면 후유증 사망자 376명 중 39명이 자살이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
장갑차와 헬기, 최신식 총기로 무장한 계엄군에 맞서 미성년자까지 포함된 오합지졸의 시민군이 차마 쏠 수도 없는 총을 나눠갖고 도청을 사수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저항인지, 그 뒤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다들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날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설명해 주는 한 단어는, '양심'이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놀랐고, 그 고양된 마음이라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모두가 그 밤에 나눠 가졌다고 설명한다. 어쩌면 이는 일제 강점기,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독립만세'와 '카레아 우라!'를 외치다 잡혀가 옥고를 치르고, 처형되었던 사람들의 마음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제국주의 시대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과 학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게 잔인하고 호전적이니, 체념해야 하는가? 그 답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니다"이다. '폭력'이 얼마나 인간의 영혼을, 그것도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영혼을 부수는지, 진수를 통해, 영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어떤 폭력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부하고 목소리를 높여 연대해야 함을 일깨운다. 폭력을 용인하는 순간, 언제든 역사는 반복된다.
5장 밤의 눈동자 :선주의 이야기
그 말 들으니까 달이 무섭잖아요 언니. 당신의 말에 모두 까르르 웃었다. 세상에, 너같이 겁 많은 앤 처음 본다. 누군가 말하며 복숭아 조각을 당신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떻게 달이 다 무섭다니.(p.136)
'달이 밤의 눈동자'라는 말에도 무서움을 느낄 만큼 겁이 많았던 선주가 한자 공부를 한다는 취지의 학습모임에 들어가 '노동법'을 배우고, 모임을 이끌어가는 성희 언니로부터 "우리는 고귀하니까"라는 말을 추임새처럼 자주 접한다. 하지만 노동 현장과 정치 현실은 그녀들을 전혀 '고귀'하게 대하질 않았다. 한강 작가는 선주의 이야기 속에 박정희 정권 유신 말기 실제 노동 현장에서 벌어졌던 동일방직 사건을 연결했다. 헌법에 명시된 근로자의 기본권인 노동 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여공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폭력적이다.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한 구사대 앞에서 옷을 벗으며 비폭력으로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선주가 어떻게 회사를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양장점 미싱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날 도청에 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늘 들어왔던 그 말,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라는 말이 그녀를 이끌었으리라.
피구 시합에서 남은 마지막 생존자,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선주의 모습에서 의아함과 희망을 동시에 본다. 이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어떻게 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녀가 어쩌면 더 이상 희생자나 피해자가 아닌 삶의 주체로서 일어서고 있는 중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피구 시합에서 피하기만 하다가 마지막 생존자가 되어 혼자 공을 받아 안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정면돌파 하겠다는 각오, 용감하게 맞서겠다는 결기. 그것이 그때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양심'이 아니었을까?
정미의 죽음이 선주를 살렸고, 동호의 죽음이 선주를 버티게 해 주었을지 모른다. 분노의 힘으로, 고통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리고 성희 언니를 직접 문병하지 않았지만, 병실 밖에서 마음을 담아 한 말, "죽지 마. 죽지 말아요."는 성희 언니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어쩌면 선주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6장 꽃 핀 쪽으로 : 동호의 어머니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라고 했던가? 30년이 지났지만 동호의 어머니는 여전히 봄이 되면 죽은 동호를 생각하며 가슴앓이를 한다.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면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라는 대목에서 지난 세월 어머니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눈물이 났다. 동호를 잃고 난 뒤, 동호의 작은 형과 큰 형은 의가 상할 만큼 다투기도 하고, 어머니도 그 밤에 도청에서 동호를 억지로라도 데려오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한다. 잠시 잠깐 정미와 정대 남매 식구에게까지 원망이 번져가기도 한다. 왜 그때 문간채를 그 집식구들에게 세를 주었을까 자책하기도 하지만, 이내 착하고 고왔던 정미와 동호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정대에게 생각이 미치면 잠시나마 나쁜 생각을 한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한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자들의 슬픔은 이처럼 평생 가슴에 응어리로 남는다. 특히 안타까운 사건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겪는 상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한다. 백수린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에도 도시가스 폭발사고로 언니를 잃은 주인공 가족이 겪는 아픔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가족을 잃고 나면 서로의 탓을 하거나, 자책하다가 가정이 깨지기도 하고, 남은 가족이 우울증을 호소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일반적 사고도 그럴진대, 광주 5.18 유족들의 아픔은 왜곡과 편견으로 인해 더 극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회상 속에 나타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목을 힘껏 잡고 '밝은 쪽'으로 이끌어가면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라고 말하는 대목은 1장부터 5장까지 수많은 죽음과 희생, 상처와 트라우마 이후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네가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호가 이제는 손을 내밀어 '밝은 쪽, 꽃 핀 쪽'으로 이끌어간다.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고 애도하고 연대함으로써, 이제는 어둠을 물리치고, 폭력을 거부하고 더 밝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는 초대로 읽힌다. 그것이 '소년'이 우리에게로 '온'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 작가의 이야기
에필로그를 읽는 내내 한강 작가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오디오북처럼 들리는 듯하다. 열 살에 처음 어깨너머로 어른들이 목소리를 낮춰 숨죽이며 이야기하던 '광주'를 들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중흥동의 옛집에 이사 온 가족이 겪었다는 불행한 일을 들었다. 희영이 고모와 선 봤던 남자와 그의 아내에게 닥친 끔찍한 일에 대해서도 작가는 대입법을 써서 상상해 본다. 만약 희영이 고모가 그와 결혼했다면 희영이 고모에게도 일어났을 수 있는 일이다. 불행이 남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로부터 이년 후, 어른들 몰래 안방 책장 안쪽에 뒤집어 꽂혀 있던 사진첩을 본 날,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라고 그날의 충격을 작가는 회상한다. 열두 살 소녀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하면, 한강 작가의 남다른 행보의 시작점이 바로 그 사진첩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토록 비극적인 일이 80년 5월 광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는데,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상처를 외면하고 지우려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은숙이 도청 민원실에 전화해 '분수대'의 물을 꺼달라고 항의하는 심정이 바로 작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취재를 하고, 자료조사를 하면서 "너무 늦게 시작했다"라는 자책을 한다. "모든 것을 지켜본 은행나무들의 상당수가 뽑혀 나가지 전, 백오십 년 된 회화나무가 말라죽기 전", 왔어야 했다는 만시지탄을 토로한다. 하지만, 작가가 느꼈던 그 절박함 덕분에 결국 <소년이 온다>가 세상에 나왔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광주를 알릴 수 있었다. 늦었다고 포기하지 않았던 작가 덕분에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동호의 작은 형이 동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에 동의하면서,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라고 한 부탁을 작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행한 듯하다. 지난 세월 동안 5.18이 얼마나 왜곡되고, 폄훼되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소년이 온다>가 역사적 비극을 제대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009년에 발생한 용산참사를 보면서 작가가 "저건 광주잖아."라고 외치는 탄식이 말해주듯,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여전히 '광주'는 형태를 바꿔가며 우리 삶 속에서, 이 지구상에서 반복되고 있다. 깨어있는 시민이 동호의 눈 덮인 무덤 앞에 촛불을 밝히는 심정으로, 단호히 폭력을 거부하고, 사랑으로 연대할 때 반복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동호가 45년이 지난 2025년에 우리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이끌어 가는 이유일 것이다.
#한강소설 #소년이온다 #광주5.18민주화운동 #역사적트라우마 #군중의도덕성 #인간이라는존재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