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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런칭 직전, 가루가 되도록 박박 갈리는 중

by 완전신간

성분 A와 성분 B가 서로 잘 섞인 상태로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 이건 인공지능으로 알 수 없을까? 일일이 실험해야만 알 수 있는 걸까.
런칭이 얼마 남지 않은 제품에 대해 갑작스럽게 안정도 이슈 사태가 불거진 탓에, 회사에서 3주 동안 철저하게 갈리고 있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야


로션이든 에센스든, 펌프에서 짜거나 떠보면 투명하거나 하얀색으로 언제나 균일한 성상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쓸 때엔 그렇게 영원히, 얌전히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렇지 않다.


그 안에는 상당히 이질적인 성분 -물과 기름 같은-들이 수십 가지 섞여 있는데, 그 제품을 다 사용할 때까지 그렇게 보이도록 최대한 버티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게 맞다. 그 상태가 1년을 가고, 3년을 갈 뿐.


이 기간을 다른 말로 ‘개봉 전/개봉 후 사용기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는 그 수많은 성분들이 균질하게 혼재된 채로 유지된다. 이러한 제품을 보고 우리 화장품 연구원들은 ‘잘’ 만든 제품이라고 부른다.




참 잘 만든 제품?


소비자가 말하는 잘 만든 제품, 혹은 좋은 제품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다. 사용 측면에서도 물론 좋고 나쁜 지를 평가하지만, 일단은 최초의 상태가 얼마나 유지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팔리기도 전에 로션이 물과 오일로 분리되어 버리거나, 침전물이 생기면 애초에 사용성을 평가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리 잘 만든 제품도 영원히 처음과 같은 상태일 수 없다. 열역학적으로 정말 정교하게 계면(system)과 계면(system)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는 제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함이란 영원하지 못한 현상 속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환상이다.



버티는 놈이 이기는겨


화장품도 인간사의 산물이니 이 또한 비슷한 속성을 갖나 보다. 결국 재직 8년 차, 이번에도 또다시 마주하고야 만다. 세상 만물은 언젠가는 풀어지고, 해지고, 사라진다. 그러하다면 역시, 삶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때로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아무튼 이것은 런칭 직전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는 K-직장인의 이야기. 잘 버티고, 사히 제품을 런칭하고나서 다시 돌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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