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항 노선 없어 17시간 날아온 한국 창업자들 열정에 독일 관계자들 감동
지난 한 주 베를린은 무척 뜨거웠다. 윤석열 대통령이 독일과 덴마크를 방문하면서, 한국과 독일의 강소 혁신 기업들의 교류를 촉진하고 격려하기 위해 유럽의 스타트업 수도인 베를린에 들른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대통령의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련 행사가 대부분 취소되었고, 아쉬움과 실망이 교차했다. 많은 행사 가운데서 스타트업 관련 행사가 취소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주최하고, 창업진흥원,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 주관한 ‘한-독 강소기업 혁신 파트너십 포럼’은 예정된 대로 2월 19일 베를린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렸다.
대통령 방문 취소 소식에도 혁신 기업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교류하고자 하는 열정은 막지 못했다. 사전 등록을 한 대부분의 기업이 참석하여 더 의미 있는 행사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행사의 시작은 ‘히든 챔피언’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독일의 경제학자 헤르만 지몬의 키노트 스피치로 시작했다. 히든 챔피언은 말 그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강소기업을 말한다. 지몬 교수는 특히 한국과 독일의 히든 챔피언 기업이 경제를 이끌 동력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이어서 카메라 렌즈, 안과 기기 등 광학 분야로 유명한 독일 대기업 칼자이스(Carl Zeiss)의 혁신팀장 오신 벨(Oshin Behl) 매니저의 발표가 있었다. 칼자이스그룹의 기업 벤처캐피털 부문을 상세한 소개하고, 한국 스타트업에 어떻게 열려 있는지를 알리는 자리였다. 칼 자이스 VC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부문의 B2B 시장을 위한 기술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광학, 반도체 제조, 산업용 품질연구, 의료 부문 등 칼자이스그룹의 주요 사업 부문과 직접 연관된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주로 제품 시장 적합성(Product Market Fit)이 검증된 프리 A나 시리즈 A 정도의 규모에 자금을 지원한다. 투자 규모는 주로 50만 유로에서 500만 유로 정도다. 칼자이스는 2022년 전 세계 최초로 한국의 경기도 화성에 이노베이션 센터를 세웠다.
독일 자동차 회사 아우디의 혁신 부서 뎅크베억슈타트(Denkwerkstatt)에서도 발표를 이어갔다. 뎅크베억슈타트는 직역하자면 ‘생각센터’, 즉 싱크탱크를 의미한다. 아우디 본사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잉골슈타트에 있지만, 그들의 혁신 싱크 탱크는 베를린에 있다. 베를린이 스타트업을 만나기 좋은 혁신 생태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아우디 싱크 탱크 팀장 팀 믹쉐(Tim Miksche)는 협력사인 테크 스타즈(Techstars)와 함께 운영하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특히 아우디가 주목해서 육성하려는 분야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다. 아우디는 전기차 충전 관련 솔루션, 차량 내부 경험을 높여 주는 솔루션, 모빌리티 사용자들의 정신 건강과 웰빙에 도움을 주는 솔루션 등 미래 모빌리티와 연관된 폭넓은 범위의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이어서 행사의 주인공인 한국 혁신 기업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중소기업 태림산업은 독일의 자동차 주요 부품사 중 하나인 ZF와 협업한 사례를 소개했다. 한국의 작은 기업이 독일의 대기업과 협력하기 위해서는 인내(Patience), 투명성(Transparency)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의 중심에는 초대받은 20여 한국 스타트업의 데모가 있었다. 전기 전자 분야의 모픽, 보스 반도체, 심포니 이미징, 유니컨, 디폰, 유씨엘트레이딩,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의 세븐포인트원, 시프트바이오, 오가노이드사이언스, 이모티브, 큐어인, 테라클, 루닛, 모빌리티 분야의 랭코드, 모라이, 이파워트레인코리아, 스칼라 데이터, 이에스피, 티비유, 포엔, 패러데이 등 각 분야 스타트업의 열정적인 발표가 이어졌다.
발표 이후 비즈니스 매칭 자리에서 메르세데스벤츠, 폭스바겐, SAP, 칼자이스, 아우디 등 독일 대기업 혁신 부서와 직접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국 창업자들이 브로셔와 피치 덱을 들고 열정적으로 자기 스타트업의 솔루션을 소개하고, 기업과 협력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현장은 열기가 넘쳤다.
행사를 주관한 중기부 창업벤처혁신실의 임정욱 실장은 베를린 딜리버리히어로 경영진과 만나 한독 혁신 생태계 교류 방안을 논의했다. 딜리버리히어로는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을 인수해, 한국과 독일을 아우르는 기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후 베를린시 국제협력부장 라이너 자이더(Rainer Seider), 아시아 베를린 서밋 운영위원장 마틴 라우센베르크(Marten Rauschenberg), 모빌리티 허브 드라이버리 CEO 티몬 럽(Timon Rupp)을 면담하고 앞으로 아시아와 베를린 혁신 생태계 교류에 있어서 한국의 역할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행사에는 헬스케어 전문 투자자이자 유럽 테크신 이주 창업자들의 커뮤니티 투 하츠(2hearts)를 만든 민성 션 킴(Min-sung sean Kim)도 참여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살던 학창 시절, 독일인 친구는 부모님 친구 몇 명만 수소문하면 쉽게 인턴십 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던 경험을 얘기했다. 이민자인 부모님은 다른 독일인 부모처럼 그렇게 해줄 수 없었다며 그래서 자신은 다른 세상을 만드는 개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투 하츠는 킴이 다른 이민자 청년들의 좋은 네트워크가 되어주겠다는 결심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사업하고자 하는 많은 창업가와 혁신가를 위해 스스로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서 후배들을 돕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포럼에도 독일에 진출하는 한국 창업자들에게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주기 위해 왔다는 그의 열정에 많은 참여자들이 감동받았다.
2월 20일에는 포럼의 부대행사로 한국 스타트업들이 독일 혁신 생태계를 방문했다. 한국 스타트업 8개 사는 유럽 최대 모빌리티 허브 ‘드라이버리’를 방문했다. 드라이버리 CEO 티몬 럽의 환영과 함께 투자 디렉터 세바스찬 레버(Sebastian Leber)가 투어를 안내했다. 현재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각광받는 모빌리티 스타트업의 솔루션을 소개하고, 베를린이 그러한 스타트업이 성장할 좋은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어서 독일에서 모빌리티 스타트업을 창업한 박소현 대표의 발표가 이어졌다. 박소현 대표는 연구원으로 독일에 와서 모빌리티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비이클(Veecle)을 창업하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을 한국 창업자들과 나누었다.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창업자로서 독일의 창업 환경이 어떤지를 몸소 겪은 생생한 후일담이 매우 흥미로웠다.
비이클은 잘란트주정부에서 5억 유로, 이후 독일 연방정부에서 13억 유로가량의 펀딩을 받고, 최근에 VC펀드레이징까지 완료했다. 한국인으로서 독일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해 투자를 받은 과정도 한국 창업자들에게 좋은 정보가 되었다. 비이클이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소개하고, 바로 한국 스타트업과 협력 가능성을 발견해 즈니스 미팅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이후 드라이버리 멤버사를 초대해 한국 창업자들과 격의 없는 네트워킹 런치가 이루어졌다. 마침 현장에 현대자동차 투자 부문인 현대 크래들(Hyundai Cradle) 관계자, 모빌리티 VC인 넥스트 모빌리티 랩스(Next Mobility Labs)의 대표 지빌레 존스(Sybille Jones)가 방문해 행사가 더욱 풍성해졌다.
지빌레 존스 대표는 “캐주얼한 런치 이벤트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을 얻었다”라며 한국 스타트업에 감명받은 모습이었다. 행사 이후 바로 한국으로 출국하는 일정이라 짐을 챙겨온 스타트업 대표들이 캐리어에서 자신이 개발한 디바이스를 바로 꺼내어 솔루션을 소개하고, 홍보 책자를 가져와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존스 대표는 “독일의 어떤 스타트업 행사에도 이런 열기는 본 적이 없었다”며 “다시 한번 이 스타트업의 기술력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행사에 참여한 한국 창업자들의 어마어마한 열정은 ‘직항 없는 베를린 방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인천과 베를린에는 직항 노선이 없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이냐며 두 번, 세 번 되묻는다. 그렇다.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오려면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암스테르담이나 파리 또는 헬싱키, 이스탄불을 거쳐야 한다. 환승까지 족히 17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다.
이 행사에 온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자신의 열정이 담긴 제품을 캐리어에 싣고, 영어 발표를 수없이 연습하고, 정성스레 영어 홍보물을 만들어 들고 편도 17시간이나 되는 먼 길을 달려왔다. 그러니 이 현장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지 않을 수 없다. 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대기업의 혁신 부서 관계자와 투자자가 있는 현장에서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드라이버리 투어에서 우연히 만난 기업가들, 투자자들에게도 다 싼 여행 가방을 풀어헤치며 제품을 꺼내어 혼신의 힘을 다해 홍보했으리라. 2박 3일의 고된 일정에서도 끝까지 기회를 잡고야 말겠다는 한국 창업자들의 노력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행사에 와 “한국과 독일 사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데 힘든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봐주는 것을 수없이 상상했다. 그러면 “다른 무엇보다 직항 노선이 필요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하고 또 대답했다. 내게 주어진 5~10초의 짧은 시간에 이 말은 꼭 하리라고 다짐했다.
대통령 방문이 취소된 것이 너무나 아쉽다. 17시간을 돌아 찾아와준 한국의 혁신가들이 가져갈 피로와 고난의 경험도 안쓰럽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나마 이곳에서 외쳐본다. 앞으로 서울과 베를린의 혁신이 직항 노선을 타고 더 빠르게 교류될 것이라고.
*이 글은 <비즈한국>의 [유럽스타트업열전]에 기고하였습니다.
이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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