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 키우기 +D 95
새벽 수유를 한 시 반쯤 했는데, 오늘은 수유할 때 핸드폰을 좀 들여다봤더니 수유 마치고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알고는 있다. 핸드폰의 청색광이 신체를 각성시키는 데 아주 으뜸이라는 것을. 핸드폰의 온갖 정보들과 불빛에 노출된 우리 신체는 중추신경계 전체가 즉시 긴장 모드에 들어간다. 나는 원체 감각적으로 민감하기도 했거니와, 하는 일이 상담 일이다 보니 트라우마와 몸과 관련된 신경생리학을 몇 년째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회사에서 했던 일 중 하나도 스트레스와 몸 관련하여 몸과 감정, 정신을 이완하고 제대로 휴식하게 돕는 집단 프로그램 운영이었다. 요가도 십 년이 훌쩍 넘게 해 왔기에 나는 몸과 친해져 '있어야' 하겠다(이론으로라면). 그래서 더더욱 그 긴장과 이완의 메커니즘이 잘 와닿는다. 불면증이 있는 내담자나 집단원들에게는 잠을 잘 자려면 잠들기 전 한두 시간부터는 핸드폰을 하지 말라고 젠체하며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론, 학습, 지도의 지평에서 벗어나 순수 "생활인"의 모드로 들어오면, 나 역시 손에서 핸드폰을 놓기가 쉽지만은 않다. 생각하는 나와 실천하는 나는 전혀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새벽 다섯 시. 두 번째 밤중 수유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무심코 불을 켰다. 벌써 아침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에 괜찮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을 켠 순간, 어둠 속에 적응되어 있던 눈이 순식간에 강렬한 LED 등에 노출되면서 눈에 플래시를 터뜨린 것처럼 자극을 받았다. 자동반사와 같이 1초 만에 불을 끄고 나서, 전에 사놓았던 아주 작은 플라스틱 무드등만 켠 채 볼일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출산 전에 아기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조명이었다. 심혈을 기울인 지금의 이 조명 시스템은 낮에는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지만 밤이 되면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조명 공사를 하기 전에 거실 천장에 위풍당당히 붙어있던 LED 등은 전 집주인이 아주 뿌듯한 태도로 자랑하던 옵션이었다. "전체 집안을 LED 등으로 했어요~."라며, 이 집을 선택하게끔 하기 위한 치트키로 조명 설치를 선택한 듯 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부분이 이 집을 선택할 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포인트였다. 내가 빛과 소리, 맛 등에 민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집안의 불빛이 그렇게까지 밝지 않았던 것 같다. 빛과 관련한 감각 기억들을 떠올려보아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밤중에 화장실에 갔을 때도 불빛이 그렇게까지 침투하는 느낌이 아니었던 건, 그 당시 화장실 조명은 노랗거나 누런 전구색이었기 때문이다(많이들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어느 날,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눈에 좋다는 "인버터 스탠드 등"을 사러 용산 전자상가에 방문했던 기억이 상당히 또렷하게 난다. 나는 인버터인지 뭔지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저 가족이 함께 나들이한다는 것이 좋았고, 직접 빨간색 스탠드를 골랐다(그리고 이후로 그 빨간 인버터 스탠드는 결혼 직전까지 나와 함께 했다). 지금은 그 장면이 내 인생의 "학업과 생산성"의 시대가 열리게 된 서막이었던 것으로 읽히며, 그 기억 역시 "또렷"하다는 게 재밌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었다. 조명 산업이 발전하면서 값싸고 오래가면서도 더욱 밝은 전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LED, LED"가 영문 명의 정확한 뜻도 모른 채 "무조건 새롭고 좋은 것"의 대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건설사들은 집안 곳곳에 LED를 심어놓았다. 그렇게 환한 밤의 시대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도처에 신속히 침투해 들어왔다. 나는 그런 현상을 빛의 공해로 느꼈다. 결혼 뒤 전셋집에서 살 때에도 밤에 중앙등을 켜는 일은 손님이 왔을 때 말고는 거의 없었다. 간접조명이나 스탠드, 혹은 빛이 조금 약한 조명등을 직접 사서 갈아 끼웠다. 가끔 어떤 손님들은 그러한 우리 집의 분위기를 매우 싫어하며 "너무 어둡다, 불 좀 더 켜라"라고 지시하곤 했다. 그들은 밝음의 쨍한 세계를 좋아했고, 밤이 가져다주는 어둠의 세계를 기피하는 듯 보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내가 느끼는 이 집안 곳곳의 빛의 침투를 아기도 고스란히 겪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임신 7개월쯤부터 고민을 시작했고, 만삭 무렵에 조명 공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그저 너무 밝은 거실 등의 교체 정도였지만 제품을 알아보다 보니 이제는 원격으로 조정할 수 있는 너무 좋은 제품들이 잘 나와있었고, 일이 커졌다. 거실 천장과 아기가 잘 안방의 등을 원격으로 조정 가능한 다운라이트로 바꾸었다. 누워서도 불을 끌 수 있고, 조명의 조도와 광도, 그리고 색채까지 내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신세계였고, 뿌듯한 노동의 (그리고 돈의) 대가였지만 남편 눈에는 그런 내가 유별나 보였던 듯하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 아기는 96일째 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기는 자연 그대로의 존재라,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에 드는 건강한 생활 패턴에 부모도 동참해주어야 한다. 아기는 아직 "생산성"과 무관한, 그리고 무관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기의 자연성을 지켜주면서 점점 부모와의 생활을 일정한 규칙으로 만들어주어 한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지금 단계에서 해주어야 할 일은 "해가 지면 조명을 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생활해 왔던 패턴이 살아있고 각종 일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해가 지면 조명을 끄는 삶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제야 나의 조명 공사의 수고로움이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아기가 저녁에 목욕을 하고 나면
거실의 다운라이트를 가장 약하게 틀어놓고 수유를 한다.
수유 후 잠시 아기를 소화시킬 때에는 그마저도 디밍으로 끄고,
거실 피아노 위에 놓인 수유등 하나만 켜 놓는다.
그렇게 아기는 밤잠의 세계에 들어간다...
하지만 아기가 잠들고 나면 나는 화장실에도 가고, 뒷정리도 하고, 건조기에서 빨래도 꺼내기 때문에 다시 조명을 켠다. 핸드폰 충전도 하고, 알람도 확인하고,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카톡 온 게 있나 확인도 하러 다시 청색광에 노출된다. 그래도 몇십 년 간 빛에 노출된 채 스스로를 조절해 온 경력이 있어 밤잠에는 어렵지 않게 들곤 한다. 하지만 깊은 밤중에 일어나 다시 빛에 노출되었을 때에는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다. 조금 심심하지만, 밤중 수유 때 최대한 핸드폰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결혼 후 10년 간 아이 없이 지냈던 우리 부부의 나름의 일상 패턴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아기가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이후 내 일상도 끊임없는 작고 큰 조율 중이다. 그 조율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것은, 아기와 조율하고 있는 삶이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중요한 것들을 자꾸 일깨우며 나를 더욱 건강하고 심심하게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를 안고 창밖을 바라보며 해가 뜨고 해가 짐을 느낄 때면 동지까지 점점 해가 짧아지고 있음을, 동지가 지나고 나서는 아주 미약하지만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유수유로 인해 하루에 물을 2리터 이상 마시다 보니 그간 내가 물을 얼마나 마지시 않았는지 깨닫는다. 물을 많이 마시다 보니 하루에 큰 볼일을 두번 씩 볼 때도 있고 임신 중의 변비는 완전히 없어졌다. 밤 열 시에서 새벽 두 시 사이에 잠을 자면 멜라토닌이 광활히 분비되어 신체와 정신이 재생되는데, 아기와 함께 잠들다 보니 잠의 절대 양은 부족해도 정신은 건강해짐을 느낀다. 예전에 참 좋아했던 만화가 고우영씨 인터뷰에서 밤 열시에 잠들고 새벽 네시에 일어나 아침 아홉시까지 작업을 하는 일과를 듣고 참 인상적이었다. 작가들 중 소수가 그러한 일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나도 그런 일과를 가져가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을것만 같다. 두번 째 새벽 수유를 마치고 아기가 다시 잠든 두어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그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수유를 하다보니 커피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몸이 더욱 건강해졌다. 일, 성과, 스피드가 중요했던 내가 하루종일 아기 스케줄에 맞춰 움직인다. 심심하고 답답하다.하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 그 시간은 더없이 달콤하다.
아기와 함께하는 삶은 내가 동물이라는 점, 몸을 가졌다는 점, 자연과 계절의 흐름 안에 들어있는 우주적 존재라는 점을 자꾸만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