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아감독, VR다큐 <동두천>
부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는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여름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2021년 7월 8일부터 열흘간 개최된 제25회 BIFAN의 테마는 ‘이상해도 괜찮아(Stay Strange)’였다. 누군가에겐 낯설고 수상한 이야기지만 굳건히 키워나간다면 결국 그 재능이 BIFAN을 통해 활짝 꽃을 피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BIFAN은 영화를 통해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시간을 선물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장르적 실험, 비욘드 리얼리티
판타지, 호러, 스릴러 등 장르 영화제를 표방해 온 BIFAN의 여러 세션 중 가상현실 세션인 ‘비욘드 리얼리티’는 관객이 직접 영화의 스토리를 체험하는 이른바 스토리두잉(storydoing) 콘텐츠 장르를 전시한다.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 혼합현실(MR)이 가져온 확장현실(XR)로 구현된 스토리는 관객의 위치를 더 이상 영화 바깥의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이번 BIFAN의 ‘비욘드 리얼리티(Beyond Reality)’ 전시는 영화제 개막 일주일 전인 7월 1일부터 18일간 인천국제공항 제1교통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철저한 방역 수칙 준수와 사전 예약제를 통해 관람 인원을 축소한 가운데 총 3,067명의 관객이 영화의 새로운 현실을 체험했다. 전시 작품은 바오밥스튜디오 특별전, XR3 한국 전시, BIFAN×Unity Short Film Challenge 수상작과 한국문화재재단이 제작한 실감 콘텐츠 등 총 80여 편이었다.
김진아 감독의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 VR다큐 3부작, 제1편 <동두천>
'비욘드 리얼리티'의 공식 선정작 중 김진아 감독이 제작한 <동두천>이 관객들을 찾았다. <동두천>은 김진아 감독의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 시리즈 중 첫 작품이다. 주한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에서 한국 정부의 주도하에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성 노동자 여성들을 다룬 것이다.
7분 길이의 VR 다큐 <동두천>은 1992년 10월 28일 주한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고 윤금이씨의 죽음을 재현한다. 윤금이씨는 사건 당일 주한미군 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Kenneth Lee Markle) 이병과 술을 마신 후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었다. 윤금이씨의 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과 그로 인한 과다출혈이었다. 범인은 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1994년 5월 17일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잔여형기를 1년 앞둔 2006년 8월에 가석방된 직후 미국으로 출국했다.
사건 당시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김진아 감독은 고인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미군 범죄에 희생된 여성들의 삶을 추모하는 방법을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여성의 신체와 성에 관련된 이미지는 관음과 폭력의 재현 대상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VR영화는 김진아감독에게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피해자의 고통과 죽음을 재현하는 장면 대신 사건이 일어난 공간과 분위기를 재현함으로써 관객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엾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다
<동두천>이 소환한 시간은 윤금이씨의 마지막 시간이다. VR 기어를 착용하면 360°로 재현된 동두천의 풍경이 펼쳐진다. 평범한 동네의 오후 시간에서 시작된 영상은 차츰 날이 저물면서 화려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외국인 관광특구의 거리로 바뀐다. 클럽과 식당이 즐비한 골목을 오가는 미군 병사들과 상점들 사이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원피스 위로 한쪽 어깨가 내려간 채 점퍼를 걸친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소리를 따라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면 갑자기 관객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그녀와 마주한다. 그녀의 무표정하고 텅 빈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잠시 이내 관객을 유령처럼 통과해서 다시 골목 안으로 걸어간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장소는 좁은 방 안이다. 바닥엔 낡은 담요가 깔려 있고, 살림이라곤 거울과 시계, 옷걸이 등이 전부인 단출한 방의 주인은 윤금이씨다.
그녀가 살던 집은 14명의 기지촌 여성들이 모여 살던 이른바 '벌집'으로 방 하나의 크기가 2평 남짓이었다. 한때 사람사는 소리들로 가득했을 공간엔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고, 열려 있는 방문 너머에선 골목에서 익숙해진 그녀의 구두소리가 들려온다. 공포의 시간 속에 놓인 관객의 시선이 잠시 방 안을 돌아보는 사이 바닥의 담요 밑으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관객은 골목에서 마주친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공간이 고 윤금이씨의 죽음의 현장임을 직감한다. 누군가의 끔찍한 폭력으로 스러져간 스물여섯 짧은 생. 감독은 그날의 사건을 폭력의 재현이 아닌 깊은 애도의 시선으로 재현한다.
<동두천>과 같은 VR 다큐멘터리는 관객이 특정 시간과 공간으로 이동한 후 그 장소에 새겨진 얼굴과 이야기, 감정들과 마주하는 경험이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그 사건과 관련된 장소와 인물, 흔적들 중 어떤 이미지와 목소리를 재현할 것인지는 창작자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달라진다. <동두천>의 재현방식은 사건의 재구성보다는 공감의 연대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진실은 밝혀졌으나 피해자의 아픔과 통증은 여전히 남아있는 장소를 통해 관객들이 문제의 본질에 주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줌으로써 윤금이씨의 죽음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여성들의 아픔에 공감하도록 안내한다. 사건의 잔혹함과 범죄의 극악함을 넘어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생명과 존엄의 가치가 훼손된 그날의 현장에서 관객은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고, 권력과 자본에 누락된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