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2박 3일 제주도 여행
어느 추운 겨울날 마산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은 무지 추웠으며 나의 첫 대학생활의 시작이자 서울살이의 시작이었다.
재수와 삼수를 하면서 서울로 대학을 가면 성공을 할 것 같다는 생각뿐인 나에게 서울은 성공을 약속해주는 곳이었다. 가끔은 여기가 불시착 같기도 하지만…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 20대에 꼭 하고 싶은 것을 10가지 적었다. 그걸 적으면서도 이 허무한 것들이 지켜질까 싶다가도 꼭 다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꼬깃꼬깃한 종이에 적은 뒤 지갑에 넣고 다녔다.
여느날과 다를바 없이 야근을 하고 맥주 한잔을 마시고 집으로 가는 건널목에 서있는데
눈물이 났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날씨가 추워서 눈물이 난다 싶었는데
눈물 때문에 신호가 몇번이 바뀌어도 건널목을 건너지 못할 정도였다.
“나 지금 정말 잘하고 있는거 맞나?”
“다들 투정없이 회사를 잘 다니는데 난 뭐지?”
“지금 이 나이에 맞는 행동이 이 모습이 맞는 것 같은데 나만 힘든건가?” “
“아…진짜…”
지하철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버텼다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느낌이다.
교통카드를 꺼내면서 꺼내본 서울 상경 첫날에 적은 20대의 다짐. 꾸깃한 종이를 펴보았다.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이 꾸깃꾸깃 해졌나 싶었다.
다시 그 마음을 펼쳐보기로 했다.
20대가 가기전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에 일순이는 무엇이었을까?
번듯한 직장 취업, 결혼, 유럽여행 보다 일순위 였던 ‘할머니와 여행가기’
직장생활을 하면 일상에서 정말 많은 슈퍼맨들을 만난난다.
나의 제일 옆자리의 슈퍼맨은 쌍둥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오는 팀장이다..
어릴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를 키운다는건 참 대단한 것이다.
회사에서 아이를 키우는 과장님,차장님들은
우리한테서는 무섭지만
아이를 돌보시는 돌보미 아주머니들 앞에서는 꼼짝없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할머니는 나를 포함해 무려 4명의 손녀들을 키우셨으니 그 노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내게 소중한 것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할머니와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표를 끊고, 숙박을 예약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여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커온 시간만큼 나이가 드신 할머니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셨다. 누군가 없으면 오랫동안 걷지를 못하는 상황이셨다. 할머니가 없으면 또 안 되는 상황은 할아버지의 식사. 한 사람의 며칠의 부재가 집안을 아직도 마비 시키는걸 보니 할머니의 존재는 대단했다. 할머니와 할머니를 키워준 조카들과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딸(나에게는 고모 2분)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비행기표를 끊고 숙박을 예약해도
늘 가슴 조리는 것은 휴가를 어떤 타이밍에 말을 해야하는 시점도 중요했다.
마침 그날은 팀장님이 기분 좋게 출근한날이었다.
할머니와 여행의 날짜는 다가오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야근을 하다보니
내일이 여행인지 그냥 휴가인지 무덤덤할때가 많다.
가족여행을 떠나면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선 유명한 관광지 위주로 동선을 짜면 편하다.
여행을 떠나기전 직업병으로 엑셀을 켜고 10분의 오차도 없이 일정표를 만들었다.
가끔 이런 나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웰컴투 팔팔한 김여사의 팔순 여행’
30분 먼저 제주도에 도착해서 할머니가 도착하면 플랜카드를 들고
을 외치고 싶지만
비행기 1시간 지연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는 내가 좋아서 눈물을 흘릴까 걱정했지만
첫 마디는 “배고프다”
미리 생각해 놓았던 음식점의 예상치 못한 휴무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건 나이가 들어도 똑같다.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공원에서 10분도 보지 못하고 지치셨다.
“할매 여기 입장료가 을마나 비싼데 좀 더 보자’
“할매 데다”
“할머니 나 할머니랑 투명카약을 꼭 타고 싶어요”
“못탄다. 무습다”
“서운해요. 나는 할매랑 카약도 타고 여기 보고 싶은데”
쇠소깍에서 투명카약을 할머니와 타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무섭다고 해서 탈 수 없었다.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제주도 여행에서 할머니와 가장 해보고 싶던 것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서운한 모습을 보이고 돌아서면서 되려 내가 미안함이 들었다.
할머니의 시간, 그리고 고모들의 시간, 나의 시간
같이 시간을 내어 여기에 왔다는 것이 중요하지 무엇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먹고, 먹기만 했다.
녹차라떼보다 경화시장 다방커피가 더 맛있다는 할머니
제주도에는 돼지가 얼마나 많길래 전부 흙돼지냐는 할머니
드라마 시간은 꼬박 맞춰서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드라마를 보시는 할머니
아침잠이 없으셔서 아침에 밖으로 나가 동내 할머니들과 수다를 떨고 있으시던 할머니
(그러고 보면 할머니들은 처음 보는데 다들 친해진다.)
피곤해서 오후가 되면 숙소에 들어가 쉬는 일정이 가장 많았지만
너무나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휴가를 왔지만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메일 아침 메일 체크를 습관처럼 할 수밖에 없다.
급하게 해안도로를 달리다 중간에 보고서를 고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여기 까지 와서 일을 해야하냐?” 라는 할머니의 말에
“일을 해야 할매를 데리고 또 여행을 오지!”
“그래 그럼 두배로 열심히 해라. 할매 배고프다”
할머니와의 여행은 일정표 10%도 소화하지 못했던 여행
(친구들이랑 갔으면 굉장히 민감할 문제다. 엑셀표에 정확한 시간에 이동하고 가이드 수준으로 다니는 나에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상사의 구박
업무의 스트레스
그래도 회사생활을 해서 목돈을 조금씩 모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너무 미안했다.
짧은 여행이라서 미안했고,
할머니가 아프시기 전 더 많이 같이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나 살기 바빠서 미안했다.
바쁘고 여유 없이 살아가는 직장인이지만
가끔 돌아보며 나에게 소중한 건 무엇이 있지
돌아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할머니의 소풍에 있어
가장 즐거웠던 소풍이었으면 좋겠다.
눈 감으시는 그 순간까지.
-제주도는 음식점 휴무가 일정하다고는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경우도 있으니 주변에 몇 곳에 음식점을 더 알아보는 센스가 필요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가면 서먹하다고 생각하면 숙소 선정시 방에 티비가 있는지 체크해볼 것
-숨은 핫 스팟 보다는 제주도하면 유명한 관광지를 가는게 마음이 편하다.
-할머니의 경우 숙소에 잠시 들어가 쉴수 있으니 숙소는 관광지 주변으로 찾아보면 좋다.
-80세 이상의 노인 여행시 항공사가 사전에 휠체어 대여를 해준는 곳이 있고, 한림공원의 경우 휠체어를 대여해주니 대여를 하면 여행하기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