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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31. 2020


맥베스는 비운의 주인공일까?

양심적인 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가 주는 교훈은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계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 놀라울 만한 사실이 아닐 것이다. 오래전부터 과도한 욕망은 경계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내려왔었다. 성서에서는 과도한 욕망을 죄악시하여 중세의 수도사들은 금욕적으로 생활했다.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는 그 도야의 과정을 통해 이룩하게 될 경지란 모든 욕망을 소거시켜 새로운 업을 쌓지 않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였다. 또한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잔혹한 학살에서도 보인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악마'라고 칭할 수 있었던 빌미는 당대의 유대인들이 탐욕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한 바람에 다른 이들이 가난하다는 논조였다. 대중들은 이미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었고 삶은 불만스러웠을 테니, 히틀러의 말은 내재된 징후를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고 보증하는 촉매제로 기능했을 뿐이다. 물론 적대적인 타자를 상정함으로써 내부적인 결속을 다질 수 있는 포퓰리즘적 정책은 현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아주 고건적인 정치 기술이지만 말이다. 적대적 실재는 상징적 질서를 강화시킨다.


 비극의 주인공이라 일컬어지는 맥베스 또한 자신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과오를 저지른 인물이다. 작중에서 맥베스는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그것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런데 해제에서 그의 착란 증세가 바로 양심이 살아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말하며, 그것이 맥베스에게 우리가 동정을 품는 이유라고 한다. 그것이 천재 소설가의 작품이 '비극'인 이유로, 맥베스가 비운의 주인공으로 지목되는 까닭이다. 또한 그가 마주하는 3마녀라는 초자연적인 존재들과의 만남과 자신의 아내인 '맥베스 부인'으로부터 권력욕으로의 과몰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를 비참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앞서 언급했듯이 탐욕이란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경계되어 왔다. 엄밀히는 경계돼 왔다기보단 그런 가르침이 전해져 내려왔다. 우리나라 구전 설화에서도 탐욕으로 인해 벌을 받는 인물을 그리거나 또는 처벌의 주체를 숭고하게 그려낸 작품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허구의 양식을 갖춘 소설이라는 장르는 현실을 초월해 있다. 즉 '현실의 이편'에는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건들이 비범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민중들의 염원이다. 그래서 사회적 선의나 대의는 현실에서 악행이라 지목된 것을 자양분으로 삼긴 하되,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애를 함축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신'이라는 관념이 이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자라는 것과 일맥한다. 신은 관념적이며 비-실체적 존재이긴 하나, 온갖 도덕성과 윤리 그리고 고결함 따위를 표상하는 개념으로, 익숙하게 들어온 권선징악이라는 말처럼 처벌의 절대적인 주체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탐욕이 이런 것들을 통해 경계되었다고 해서 절제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시대에 문제적인 사건들을 마주하며 과거의 향수에 젖을 필요도 없다. 이것은 오히려 오도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과거가 더 나았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탐욕은 시대를 막론하고 경계되어 왔지만, 그 결과는 항상 실패했다. 이것은 정담이라고 정해진 것, 어떤 모범답안이라는 것이 뻔하면서 공허하지만 누누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도의를 저버리는 짓을 행했고 그 자신도 처벌을 받게 된다는 '선의 승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주제의 결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또한 그런 류의 결말이다. 그러나 앞서 의문을 던져 놓은 것을 반복컨대, 정녕 맥베스가 양심이란 것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주 잠깐 눈이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석하려면 '양심'의 보편성에 대해 굳게 믿고 있거나, 아니면 셰익스피어를 우상화하는 작업이거나 이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에는 무언가 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을 거야!- 물론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심적인 차원을 면밀하게 통찰해 낸 거장 중 거장이다. 그의 저작들은 분명 심오하다. 정신분석 전공자들조차 정신분석이 무엇인 지를 도통 알 수가 없다며 혀를 내두르는데, 그럴 때마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중 주인공인 맥베스의 존재가 고귀한 인간성의 지표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맥베스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맥베스의 대사는 그가 진정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 지를 말해준다. '피를 부를 거랍니다. 피는 피를 부를 거요. 돌들이 움직이고 나무가 말한 적이 있으며 까치와 갈까마귀, 당까마귀 등을 통한 점술과 예언으로 깊이 숨을 살인자를 밝혀낸 일도 있소' 그가 이해하고 있었던 사실은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즉 진실로 말미암은 폭력이 자신을 덮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독자들마다 소설에 등장하는 초월적 존재들의 실존 여부가 논쟁거리라고 하는데, 이것의 시비를 따지는 건 꽤 중요하다. 이것으로 인해 맥베스의 성격을 평하는 입장이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맥베스가 마녀들이나 자신의 부인 때문에 탐욕에 물들어 버린 것이라면 맥베스의 죄가 경감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스스로 선택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맥베스는 스스로 선택을 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탓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징후는 '원망'이다. 자기 자신이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를 탓할 리가 없다. 맥베스는 작중에서 마녀나 자신의 부인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녀의 존재는 맥베스가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해주는 역할이었고, 심지어 자신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죄의식을 계속해서 누그러뜨리는 심리적 기제로 활용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마녀들의 존재는 실존적이라기보단 맥베스 본인의 망상이었다는 주장에 더 힘이 실린다. 맥베스에게 마녀의 존재란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보증인즉, 탐욕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욕망이다. 그로 인해 모든 것들은 맥베스의 잘못이다. 이 잘못에 따른 비극이란 비도덕성으로 인해 몸과 머리가 분리되고 마는 죽음 자체의 비참함 정도에 그친다.


 마녀의 존재가 망상일 뿐이었다면, 맥베스는 그저 비도덕적인 인물이라고 평하기가 더 쉬워진다. 그렇다면 망상증에 시달리며 괴로워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가 절실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절박하게 피하고자 했던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불찰-왕을 살해한 권력욕-로 인해 자신도 동일하게 그런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 그의 공포는 양심이라기보단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한 번도 양심적이지 않았던 맥베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기 보단 자신이 애써서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실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맥베스의 심적 고통은 끝없는 망상으로 재현되며, 그로 인해 계속해서 또 다른 과오를 저지른다. 그 과오를 통해 더 과격해진 정신병으로 맥베스는 더 큰 고통 속으로 회부된다. 그러나 주체는 그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 왜냐하면 맥베스가 그 착란을 멈추기 위해서 그만두어야 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 징후의 귀결점은 맥베스의 은밀한 중얼거림에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심적인 고통의 충만함으로 인해, 삶이란 한낮 연극에 불과하며 인생은 난잡하고 시끄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상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파괴성의 극단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맥베스의 극단적인 무의미함은 세계가 무화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온 우주가 이제는 끝장나면 좋겠다!"- 그러나 공포에 짓눌려 있는 존재인 맥베스는 삶의 끝인 '무-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기정 사실화된 것은 자신의 패배이다. 즉 죽음을 대하는 존재가 마주해 있는 공포는 자신과 대항해 있는 '반란군'이었다. 맥베스의 고통으로 주어진 것은 자신의 '욕망' 유지할 수 없게끔 가로막는 '실재'인 반란군이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맥베스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고귀함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어떤 동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맥베스보다는 별로 비중이 없어 보이는 '맬컴'과 '맥더프'의 대화에서 보인 철저한 자기 객관화 과정이 고귀하다면 고귀했다. 맬컴은 맥더프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난 하나도 없소이다. 왕에게 어울리는 정의감, 진실성, 절제와 안정감, 관대함, 끈기와 자비심, 겸손함, 경건함, 인내심, 용기와 불굴의 정신은 기미도 안 보이고, 풍성한 죄악을 제각각 세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범하고 있소이다. 내가 만일 집권하면 화합의 꿀물은 지옥으로 쏟아붓고 안녕을 깨뜨리며 이 세상 모든 조화를 파괴할 것이오" 맬컴 스스로가 자신이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라면 인간적이다. 실제로도 스스로 위선자라고 칭하는 사람이 스스로 선하다고 타인에게 말하고 다니며 선한 관념들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보다도 더 정의롭다. 자기 자신에게 선함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손사례 치는 선한 사람들 말이다. (물론 이것은 맬컴이 맥더프를 시험하기 위해 던진 말이기도 하다.)


 맥베스를 읽고 난 뒤 나는 통쾌함을 느꼈다. 왜 맥베스의 삶이 비극적인 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필귀정, 즉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일 뿐이다.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비극이라면 우리 모두는 비극을 겪는다. -인생은 원래 비극인가, 그래서 뭐?- 내 눈에 맥베스는 전혀 양심적이지도 않고 고귀한 인간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특히 작중에 맥베스가 자객을 보내어 죽게 된 맥더프의 부인과 아들의 대화 속에서 양심에 대한 너무나도 익숙한 진리가 드러난다. 맥더프의 아들의 떼 묻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양심적 행위는 맥베스의 비-인간성에 반한다. "정직한 자가 가장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끝낸다" -양심적인 자는 극단적인 무의미 속에서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주력한다- 비극이 비극이라면 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맥베스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이 권력을 갖길 바라는 허영심에 찌들어 있는 아내의 말을 따랐으며 마녀들이 자신에게 저주를 내리는 건지도 모르고 그들의 말을 굳게 믿었다. 인간의 무지가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맥베스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 지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탐욕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현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나 이해하고 있는 익숙한 정서일 것이다. 그것은 '부러움'이다.


 명예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폴레옹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부러워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틀림없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행복의 정복, 버트런트 러셀-


 ps. 반란군의 수장격인 '시워드'가 자신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었는데 그 상처가 이마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의 병사'라고 칭한다. 그 상처는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웠다는 징표인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유물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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