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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Nov 04. 2020

진부한 글쓰기 2

이념의 소진

 우리가 믿고 따르는 무형의 개념인 '질서'는 우리가 이것을 절실히 믿고 따를 시에 생존과 존재를 보장하고 있다고 믿게끔 만든다. 동시에 인간 존재가 믿고 있는 어떤 내용물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한다. 우리가 기억을 잃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존재를 불안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치매가 극도록 무서운 병이라고 하던가? 그런데 그 이유는 유아기적으로 극단적인 퇴행해 버리는 알츠하이머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끔찍한 병이라 불리지 않는가. 그러나 병에 걸린 본인의 경우에는 어떨까?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미쳤다거나 아니면 뭔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의식하지 못한다는 불행을 떠안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박학한 무지', 즉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겸손을 표방한다. 정보화 시대에 이것만큼이나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없다며 아는 것이 힘이라고까지 격상된 논조로 말한다만, 이런 속담도 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주체는 상황에 따라서, 주변의 환경에 따라,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질서에 따라, 즉 실재라고 칭해진 곳에 피투된 존재로서 우리는 생각보다도 더 무지몽매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알아야만 더욱 번창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렇게 교육받고 행했다. 물론, 자본주의에서는 주식 시장에서 좋은 정보를 취득해 더 많은 자본 수익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다.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 주식 시장에 자본이 몰리고 있는 낙관이 무지의 역설로 보이지 않는다면, 마땅한 답변이란 무엇인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질 때 불어온 낙관적인 전망-이제부터 불황은 없다!-부터 일본에서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불어온 부동산 열풍, 그리고 우리나라 IMF 때에도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이 과도한 유동성을 불러온 것처럼, 낙관주의는 불안을 투사하려는 대체적 심급이 아니던가? 그런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무언가를 많이 안다는 것은 꽤 불편하기도 하다. 많이 배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시니피앙의 끌어당김, 즉 성실성의 보증인이자 자기 징벌적 측면인 대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죄의식과 함께한다. 말귀를 잘 알아먹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질서 정연함을 따르지만 그 너머에 무질서함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체 '질서'란 무엇인가? 예컨대, 일상에서 장을 보기 위해서 줄을 서서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도 일종의 질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서에는 일정한 수순을 밟기 위한 인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격언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인내하는 자가 인생에서 반드시 성공을 쟁취할 것이라는 진부하지만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이 동일자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나의 물음은 편협해 보일지언정 아주 간단명료하다. 현시대의 수호성인 쯤으로 치부되는 듯한 '엘론 머스크'와 같은 인물을 떠올려 보자. 그 사람의 경우에 한 주에 100시간 일을 한다. 하루 동안에 14시간하고도 17분 9초를 일해야 7일 동안 100시간 3초를 일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가 이만큼의 시간 동안 일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의 동기는 각광받을만하며 스스로에게도 소명의식을 갖추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처럼 100시간을 일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내적 동기와 행동 방식을 연구한다. 시장에 넘쳐나는 성공에 관한 자기 계발 서적에는 성공을 위해 일관해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처럼 100시간을 일하기 위해서 원대한 포부를 갖고 목표의식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자족스러운 일, 즉 관심을 충족시킬만한 일을 찾는다. 그런 지침들은 옳다. 그리고 옳다고 믿는 방식에 따라 나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동일화, 그러한 동일화는 성공할 수 있을까? 즉 100시간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개인의 역량에 따른 문제라고 못 박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러한 상대적 차이는 존재한다. 이미 급은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급을 나누려는 의식의 존재 이유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현시대의 가르침은 수호성인이 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요구한다. 그러한 우상화 작업의 생산자들과 그 생산물에 동참하는 피학적 인간 성향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관철된다. 그 혐오는 주체의 무능력함에 편승해 있지만 서도, 그러한 자학성을 유지하려는 이유란 무엇인가? 이런 측면에서 정신분석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며 진정하게 욕망하는 것은 그 욕망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들은 마조히스트들에게 아주 쉽게 먹혀드는 고전적 정치 기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예의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유교 문화 때문인가? 공자는 '군신유의', 군자와 신하 사이의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 맹목적인 충성심만을 강조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급을 나누기를 좋아하는가? 타인보다 더 앞서 있다는 비교우위. 왜 이런 현상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확실히 관찰된다.


 정신분석은 정신병자와 신경증자의 심리를 다룬다. 일반적 수준의 지성을 가진 신경증적인 사람이 병리적 수준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아마 이러한 고행이 필요하다. 고행이란, 성공하기 위한 올바른 습관을 갖추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며 필연적으로 잠 또한 줄여야 한다. 더해서 즉각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우리에게 망설이고 방황하는 시간조차도 줄일 만큼의 의지력! 이 시대에는 그러한 시간들이 사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들먹이는 진화론에 대한 논조는 자연에서의 나태가 도태로 이어진다는 오로지 공포만을 원동력으로 삼은 존재로 인간을 추락시킨다. 그러나 다행히 하루 세 끼 입에 먹을거리를 넣어줄 수 있을만큼의 경제력은 공포보다는 불안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그러한 불안은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만한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부득이하게도 본인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면 유감이다.


 주체는 이 도야의 과정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운동을 행한다. 자유에 대한 갈망 속에서 상상적인 타자와 마주했을 때에 충족되는 원인 모를 도취감 이후에 그러한 도발적인 갈망이 한계에 부딪힘에 따라 얻게 되는 상실점, 삶이란 이율배반의 무한한 반복 운동이며 그 운동성 내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채 마주하는 부정성인 자유의 한계를 경험한 사람의 정신은 광기에 접근한다. 그러한 광기는 욕망의 불가능성, 반복을 강제하는 외설적 불멸성, 즉 욕망은 결코 멈출 줄도 모르고 사라지는 법도 모른다. 나는 '노력하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불길한 외침이 귓가를 맴돌 때 마치 이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위선적인 모호함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하다 보면 언젠간 마주하게 될 시기, 정말 힘이 필요한 순간에는 힘을 낼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하면 그 순간에 누군가는 혼돈을 일으키겠으나 그 와중에 정직한 자들은 자살을 택한다. 그렇다면 자살은 도덕성의 척도이지 않는가?


 무의식이 열릴 때 항상 타자가 있다거나 무의식에 타자가 새겨진다는 진실된 말, 그리고 대타자는 기억의 저장소라는 짧은 문구들은 이 세계를 좀 더 세밀하게 조명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한 번 더 묻기를, 그래서 '질서'란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헤겔의 말대로 '이성이 코 앞에 와 있다. 무릎을 꿇으라!'는 천명을 통해 인간 존재는 무엇을 쟁취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시대를 앞서 나간 지성적 물음과 그 자체로서의 위대함에 생각해볼 따름이지만, 현실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관계' 밖에 없었다. 주체로서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주체 또한 누군가에겐 타자로서 맺는 관계만이 내 눈에 보이는 전부이다. 형이상학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세계의 '형'을 뛰어넘어 있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의 실패를 보충하기 위해 등장했지만 비실재적이며 비가시적인 채로 은밀하게만 이 세계와 공모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일례로, 헤겔 또한 나폴레옹을 보고 '백마를 탄 시대정신이 지나간다'라고 말했지만, 헤겔은 그가 선택한 영웅의 변질, 즉 인간적인 야심인 권력욕을 보고 실망한 후에야 비로소 형이상학이라는 모호함으로 나아가지 않았는가. -불가능한 지침을 따르는 공모 관계- 형이상학은 현실의 실패로 인한 잔여로 보인다. 여담으로 지젝이 마르크스처럼 세계 전체 노동자의 단합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더없이 자명해 보인다. 현실에서는 서로의 급을 메기며 자기 자신의 열등의식을 보상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노동자의 모습이 더 익숙할 따름이다. 자신의 급을 성급하게 추정하지 않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문화의 과잉, 현실 지각의 초과, 욕망의 잔여분 그리고 대타자의 외설적 명령들. 그로 인해 불안한 주체들의 세상에는 모방이 판을 치며 모조품을 치장하고 거짓된 말들이 거리낌 없이 분출된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피상적으로 보증하는 거짓된 수단들이 넘쳐난다. -진실을 가리기 위한 범람- 타인을 속여도 하늘과 자기 자신만큼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양심에 관한 교리적 문구는 설교로 그친다. 왜냐하면 '타인을 속이는 것'으로의 목적은 존재자의 존재를 위한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부한 반복이지만 이러한 모방의 불가능성이 한계를 규정하는 지점에서 저열함이 탄생한다. 과격함과 비-상식적인 행위들과 불안정성의 불가항력적 침입은 일상성과 일반성 그리고 평온 따위와 뒤틀린 채 혼합되고 그곳에서는 이성에 관한 충동적 욕구만이 끊임없이 회귀한다. -광기의 미분화- 무질서에 관해 온갖 회의와 인간에 대한 불신을 가진 자들은 법과 처벌이 만인의 위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공정함을 위해 눈을 가린 여신은 정말 아무것도 구별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두 눈을 감는 게 더 나은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마치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더 이상 지각하지도 의식하지도 않는 것.


 잠을 줄이는 게 필수적이게 된 현실에서 그것을 마땅히 해야할 조건들이 차고 넘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해 조금 반론을 펼쳐보자면, 우리가 학습을 할 때 '아세틸콜린'이라는 호르몬이 분출되는데 이 호르몬은 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그러니까 콜린성 호르몬은 우리가 공부를 할 때 필수적인 호르몬이라는 것이다. 특히 뇌에서 미세한 전기 자극들이 발생하는데 이 자극들이 뇌에 아주 사소한 상처들을 남긴다고 한다. 그러한 상처들이 축적되면 뇌는 회복 불능 상태로 접어든다. 여기서 호르몬의 역할은 그러한 상처들을 소독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족하게 되면 우리는 자고 싶지 않아도 잠을 자게 된다. 또한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주 좋은 고문 방법 중 하나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 6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으면 뇌가 괴사 상태에 이르러 죽게 된다. 보통 사람이 아닌 초인의 경우에는 평생토록 잠을 자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다. 최근에 장시간 일을 하다 과로로 죽은 노동자의 소식이 들리는데 애도를 표하는 것에 그치도록 하자. 불길한 소식을 듣고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친구가 콜린성 알레르기에 걸려 항히스타민제를 처방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소식 때문인지 괜스레 친구가 걱정된다. 참고로 히스타민은 각성에 도움을 주는 호르몬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옆에 있는 친구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만, 나는 그들을 설득할 능력이 부족하다. 나의 무능력을 탓으로 돌리는 게 내가 조금이나마 더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될 터이지만 무언가를 도모해 볼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나마 유일하게 내가 하는 말들을 모두 알아듣는 한 친구가 있는데, 내가 c를 말하기 위해서 a와 b를 설명하고 있으면 c를 예측해서 말하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친구이다. 담화 중에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것'을 가능케 하려면 경영학에서 종종 말해지는 박력을 가진 리더, 즉 사람들을 이끌만한 충분한 리더십과 실천력과 꺾이지 않는 기개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나도 동감하는 편이다. 니체는 스스로 영웅이 되라고 말한다만, 영웅이 되기보다는 광인이 되지 않기로 했으며 스피노자처럼 렌즈 세공 기술을 배울 생각이다. 자유란 생을 고사할 만큼의 가치를 지녔다고 말한다면 반론으로 죽으면 자유조차도 없다고 말하겠다. 그리고 하염없이 로베스 피에르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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