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릿해진다고 말한다만 과연 이 말은 얼마나 합당한가? 통상적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법한 '기억의 망각'이라는 현상은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극히 드물게 어릴 때의 기억이 드문드문 나긴 한다만 그렇다고 한들 일련의 사건의 총체성을 전부 상기할 수 있는 건 결단코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망각의 동물이라는 인간은 망각의 저편에서 자기 존재를 놓아둔 상태에서의 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마주한 현실은 왜곡된 현실이다. 그 수여된 현실에서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Cogito는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유아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그리고 늙어감에 따라 내가 잊고 있다고 믿는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맞춰 점차적으로 유보되는 기억이기도 하다. 회상과 망각의 적확한 분기점을 정확히 명시할 순 없겠지만, 그러한 분기에서 기억을 생성하던 주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기억에 얽매인다. 기억의 편린들은 어느새 주체가 욕망하는 바를 적절하게 공시하지만 그것은 은밀하고 모호하다. 그 모호한 축적물인 욕망의 이정표가 자신의 삶을 진척시킨다. 이에 따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는 끌려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운명이란 개척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개척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기존의 관성을 충족하면서 얻어지는 절실함이다. 감동적인 문구는 그 자체로서 나름대로의 효용을 갖지만 본래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예방적 대책에 불과하다.
그러한 관성으로 주체는 현실에서 만나는 타자에게 어떤 특별한 요구를 할 수 있는데, 그 요구에는 욕망이 예속되어 있다. 주체는 그러한 예속이 대상관계에 어떤 특별함을 부여하고 유지시켜준다고 믿고 있는데, 여기서 불가해한 욕망이 그러한 요구를 충족하고 또 지탱하고 있다는 역전된 진술이 성립한다. 즉 욕망은 주체의 요구의 설계자이지만 동시에 기존에 체화한 요구의 좌절까지도 지탱한다. 자신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함으로의 치환이 자아인 것이다. 자아란 욕망의 환유이며 욕망은 존재에의 결여의 환유이다. 이 첨예하게 구조화된 욕망의 등가물에서 주체는 이것에 목숨을 빚지고 있기도 하지만 도리어 욕망은 주체를 박탈시킨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일련의 욕망들을 보고서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다거나 또는 숙명과도 같은 장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것 같은 낱말들과 결부 시킴으로써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주체는 그런 의미 부여를 통해 관계를 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의미 부여된 대상은 그 자체로 주체에게 죄스러운 분투를 반복케하는 원인자이며 여기서 정념의 열정은 수동적이다. 안타깝게도 애초에 그 속에 '나'라고 불리는 존재자가 들어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다. 존재했더라면 과잉 상태를 유지할 리가 없다.
그러나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주체가 말을 건네고 있는 타자와 그 타자와의 연결을 보증하고 있는 담화인 즉슨, 욕망은 상징적 질서를 따른다. 이는 시피니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우위로, 욕망은 상징의 기로를 따라야 합당해질 수 있게 된다. 만약 그것을 통로로 삼지 않는 욕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성을 점지하고 있는 잔여물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절실히 추구하는 욕망과 자신의 욕망에 대한 인정을 보증하는 상징에서의 절대적 공백, 시니피앙의 배열에서 난 균열로 인해 포획될 수 없는 욕망은 잔여이다. 이에 따라 주체는 중층 결정되어 있다. 주체는 대타자를 상형하는 대문자 S에서 빗금쳐진 주체로 등장한다. 빗금쳐진 주체의 존재 판단은 이미 긍정되고 있는 귀속판단으로부터 현실성을 수여받는다. 그리고 여기서 욕망에 관한 역설적인 진술이 성립한다. 주체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지만 또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미약하게 연결된 시니피앙의 사슬 위에서의 욕망의 속성은 부재이지만 본위적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불가능한 것'이란 단순히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없을 뜻하는 것이 아닌, 욕망과 시니피앙의 양립-불가능성이다. 부재함의 성취물이자 상상적 내용물인 존재판단은 언제나 그렇듯이 성급하고 무모하게 소급 적용된다. 선험적 차원에서의 모호성으로 이해되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양태로 말이다. 긍정과 부정을 순회하는 변증법적 운동에서의 주체의 과잉은 현실적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며 현실은 빈약한 곳으로 남는다. 그로써 완성된 빈약함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할 따름이지만 불가능한 욕망은 역으로 현실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빈약함 위에서 애써 가며 유지되고 있는 불가능한 욕망은 대타자에게 의존적이다. 그주체의 욕망은 성실함의 보증인의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것, 곧 그것과의 괴리로 인해 존재의 결여된 지점마다 새로운 양태를 갖추려 하는데, 이는힘에의 의지로 이해된다. 아니면 광기이거나.
과잉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강박증자에게 있어 자신의 욕망은 곧 대타자의 욕망이다. 그러나 강박증자는 자신의 욕망을 파괴시키고 욕망하는 것에서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낡은 마조히즘적인 도착으로서, 외재적으로 소여된 관성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러나 강박증자는 자기 자신이 이미 미쳐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기에도 터무니없어 보이는 잔여물을 '찌꺼기'로 인식하는 순간에 본능으로의 퇴행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퇴행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부정적 수사를 부여잡는 자들은 이것을 흔히 삶의 '의미' 아니면 '가치' 따위로 부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헛된 희망'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낱말에서, '희망'은 그 자체로 주체를 속박하고 있는 사슬이자 고상함이며 포기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반면 '헛된'이라는 표현은 부정적 심급을 표상한다. 저 짦은 두 단어는 존재의 최소 단위이지만 본성상 부재를 상징하는 것이면서도 주체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까지 한 말들은 현실의 사태를 표현하고 있을 뿐, 본질적인 것은 관성이 아닌 그러한 관성을 지탱할 수 있느냐이다. 그 관성을 버티지 못하게 된다면, 즉 헛된 희망이란 것조차 품지 못할 지경이 된다면 비로소 파괴성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현시대에 그러한 관성은 무엇인가? 만인이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또한 항상 만인을 시험에 들게하는 대타자, 그것은 '물신'이라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