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질
타자와의 동일화라는 주체의 나르시시즘적인 구조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인 '인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정신 병리적 개념이다. 자아 구조의 내재적 총체성은 타자와의 동일성을 자연스레 구축하기도 하지만 이는 일종의 요구이며 의존적 양태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자는 없다. 어느 누구나 적절하게 자기애를 갖는다. 물론 만인에게 병리적 의미를 부여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게 불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거나, 어떤 곳에서라도 주목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극심한 관심 종자, 그리고 추가적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우월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러한 편집증, 즉 구조화된 논리인 합리화된 망상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뭐 이런 것들이 배운다고 한들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며 일종의 괴질이다. 그 까닭은 그 병을 딱히 고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망상을 자양분으로 삼은 사람들의 다수는 대개 소외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인해 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박탈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특히 그러한 경험을 타자에게 투사하는데, 이 방식에 의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불리해지거나 득이 될 것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면 그것이 마치 재능이거나 또는 어른스러움의 지표라도 되는 것인 양 굴며 손쉽게 관계를 끊어내기도 한다. 그것에 의기양양해 하지만 일종의 방어 기제에 불과하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먼저 밀쳐내는 것, 즉 자기 연민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내적 지반에는 소외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그런 기제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2가지 정도의 조건이 부가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그들 스스로 자의적으로 명령할 수 없는 마조히즘적인 성향, '자동인형' 내지 '충직한 개'쯤으로 명명되는 비하적인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 부적절함을 지칭하는 적절한 표현인데, 그들은 막상 소외를 겪게 되면 타자의 명령 없이 존재하지 못하며 자족성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한 한계가 그들이 존재적 지평이 열리는 때마다 자동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모멸감을 극도로 경계하고 자신의 체면을 중시한다. 간혹 나르시시스트들은 피로감만 불러오기 때문에 경계하고 기피해야 할 대상이라 종종 말한다만, 그들만큼 다루기 쉬운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그들은 달콤한 말 몇 마디에 생각보다도 쉽게 마음의 문을 연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 쉽게 문을 닫기도 하지만 말이다. 상호 간의 얄팍한 믿음으로 구축된 관계가 정신 건강에 좋지 못하다는 건 사실이다. 피상적인 인간관계는 무의미하다.
정신분석에서는 피분석자의 불만족을 현재화한다. 통시적으로 병합된 원천으로서의 강박은 분명 무언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동력이자 때로는 어떤 일을 광적으로 유희하게 만드는 힘이지만, 그러한 동력이 타성에 기반해 있을 시에는 자신의 머릿속에 넘쳐나는 표상에 집중하기보다는 지각된 사태에 집중하는 실존주의자가 된다. 물론 그러한 타성의 구조는 보편적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를 갖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유아기적에 타자를 위해 존재했었다는 선재적 경험의 보편성이 타성의 시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일반적으로 언제나 망각의 영속적 영역일 수밖에 없는 절대적 시간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그 시간에서의 형성된 자아는 주체를 타자성에 종속된 채 조망한다. 그 시절의 경이로운 경험은 주체가 주체 자신을 세계와 접합해 있는 타자로서 체험하는 시기이다. 여담으로 생리심리학 저서에서는 '거울 뉴런'이라는 개념을 썼던데 개인적으로 참 난해할 뿐이다. 모든 것들을 물질주의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움직임.
인정에 대한 욕구의 좌절은 인간 존재를 소외로 내몰지만, 반대로 이 소외에 끊임없이 맞서 있었기에, 즉 소외되지 않으려는 심성 덕에 사회성이란 것이 형성될 수 있지 않는가. 이 사실로 인해 타자에게 자신의 복됨을 명명하기도 하며 또한 복된 자들의 앞길에 훼방을 놓아선 안 된다는 식의, 개탄스러울 지경의 동경을 걸치기도 한다. 타자를 동경하는 주체는 일종의 존경이 주체 본인의 위치를 보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보증의 지표란, 유아에게 막역하고도 불확실성이 판 치는 세계 속에서 거울 자아로서 등장하는 주체를 접합하는 환영인, 소외로 인한 고립감을 무화시켜주는 '자아의 이상형', 즉 이마고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우상을 새겨놓기 마련인가? 현시대에는 이러한 외재성이 자신이 얼마나 자기 객관화를 훌륭하게 하고 있는지 측정하는 지표로 활용되기도 한다. 아직도 파편화와 세분하게 분열이 진행되는 세상, 그 덕에 줄 세우기도 더 쉬워졌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한 정신을 위한 미국식 정신분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며 각광을 받는데, 대다수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좋은 말들을 건네주라는 조언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삶이 불안했건 그렇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것의 극적인 양태가 자의식 과잉 상태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반복컨대, 괴질을 그만둘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지각하고 있는지에 관한 유무에 따라 '괴질'이라고 칭할지를, 그리고 존재 양식에서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잉 상태의 징후는 명확하다. 바로 자조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촘스키는 이를 비틀어 과격하게 표현을 했는데 그의 말을 그대로 적어 보자면. '인간은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보고 "개새끼"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이다.' 글을 쓰다 말고 실소를 머금게 되었는데, 왜 거울한테 말을 거는가. 부질 없는 짓이다. 그러나 왜 거울 속 자신에게 말을 건네려고 하는 지는 꽤 중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