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대해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세계의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는 말에 동조한다는 건 현시대에 부합하는 조언으로서 아주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사실 현실을 살라는 말속에는 아무런 자족성도 갖춰져 있지 않다. 이는 억측에 불과한가? 그러한 발화에서의 수준에서 눈여겨볼 점은 누구나 존재론적인 동일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타자에게 냉정한 시선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조차 그러한 관점을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주체는 타자에게 대타자의 보증을 받는 자신의 원칙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을 꽤 정당하다며 당위성을 부여한다. 살아가면서 원칙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그리 나쁘게 보진 않는다. 문제는 그 원칙으로 인한 타자화로 인해 관계 상의 부조화를 체현하는 것이며 이는 곧 자아의 일부인 타자성을 훼손시키는 일이 되어버린다. 물론 세상살이에 만날 사람은 넘치고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거나 유사하다 생각되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태여 반복컨대, 억압은 이미 현존재의 판단을 규정한다.
그렇다면 억압된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타자와 유대를 맺을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 전체에 새겨진 윤리적 강령을 따르는 것으로, 그러니까 단순히 습속을 따르는 것만으로 타자와의 유대를 유지하며 이 사회란 곳이 지탱된다는 건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이 낭만은 항시 유효할지 모르겠으나 그 유효성이란 것은 언제나 비판받아야 마땅하고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변론의 과정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좌우지간, 권위에 대한 비판은 논외로 치더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며 자기를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난처할 따름이다. 정신분석에서의 급진적 주장으로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병리적이다. 그리고 병리적 주체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동일화의 실패, 즉 타자의 호응이 부재할 때이다. 주체가 단독자로서 존재하지 못한다는 불가해함이 되레 급진적 주장을 충족하되, 여기서 병리적 정신 양태의 결말은 현세태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극도로 합리적이게 되거나 몰락하거나." 이 말은 니체가 한 말이다. 자신이 현자이든 범인이든 광인이든 간에 누구든지 범람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주체의 상상을 종용하는 담론의 질서는 주체의 내부에도 존속하고 외부에도 존재한다. 라캉의 말대로 무의식은 주체의 안쪽에도 존재하고 바깥에도 존재한다. 주체는 무의식적으로 이 질서를 따른다. 무의식이 열리는 순간에 거기서 어떤 옳음이란 맹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성적 힘을 지탱하는 것이 문명 속의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자격, 곧 책임이라 불리는 개념이 등장하는 곳이다. 그런데 '책임' 개념이 등장하는 곳마다 함께 등장하는 개념은 '처벌'이다. 간혹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범죄자가 출몰하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처벌의 수위가 너무 약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이에 따라 법의 예방적 기능을 충당하기 위한 통제적 방법이 강구되는데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자유를 얻지 못한 광인은 패자의 자살적 권리를 실현시킨다.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던지며 파괴성을 실현키는 주체에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하며 인간성을 버려선 안 된다."는 대타자의 명령은 얼마나 위태롭기 그지없는가. 최근에 영국에 한 여성이 강간을 당하고 살인을 당한 끔찍한 범죄가 벌어졌다. 분노한 여성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했으며, 한 여성 의원은 남성들을 6시 이후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법안을 발의했다. 여기서 드는 의구심. 과연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범죄자가 '통금 6시'라는 제한적 규칙을 지킬까? 유감이지만 죽은 여성은 두 가지 불행을 맞닥뜨렸다. 하나는 범죄자를 만난 것이고 나머지는 의협심과 정의감이 넘치며 강인한 신체를 가진 남성이 주변을 지나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체와 타자는 대타자의 위상 아래에서 삶을 영위하지만 대타자는 얼마나 무기력하고 빈약한가. 이 위상 아래에서 존재적 지반이 마련되는데, 만약 과잉된 현실성을 지탱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될까? 사실 광인이 분명 주기적으로 출몰하긴 하나 이는 너무 극단적인 경우이니, 이왕이면 좀 더 납득할 만한 수준이 필요하다. 특히 여기서는 주체의 상상적 지위와 '퇴행'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주체의 상상적 지위, 즉 욕망의 연점에서 등장하는 주체를 사로잡는 환상적 이미지가 축소된다는 것은 그 이미지에 부여한 '의미' 따위도 함께 사라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는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소실점이자 불만족의 체현이다. 이에 따라 무상함을 느낀다. 여기서 두 가지 불가해함이 전제된다. 하나는 상상을 규정하는 담론의 질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는커녕 그 존재의 여부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주체가 진정하게 욕망하는 것은 욕망의 실현이 아닌 자신의 욕망과 계속 거리를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체가 가능성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판결에 가닿는 순간에 퇴행에 적응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때에 퇴행으로 인한 심적 고통을 덜기 위해 망각을 기제로 삼는 여러 행위들에 치중한다. 예컨대, 게임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은 가장 흔한 예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술의 알코올 성분은 신경 뉴런의 연결 체계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뉴런들의 자극의 전위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이다. 또한 알코올과 비슷하게 마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니면, 간혹 사업이 안 풀리고 인간관계에 실망해 속세를 떠나 사는 사람들이 매체에서 나온다.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삶도 퇴행의 징후일 따름이다. 그러나 역시 여기 적힌 글들은 정신분석적 관점이기에, '리비도' 즉 '성적 욕망'에 따라 말해보자면, 성관계 또한 퇴행의 징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다. 이러한 행동 양식들은 퇴행으로 인한 결과라고 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현실성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단편적으로는 욕망이 좌절된 결과이다. 라캉의 말대로, "욕망은 제거되는 경우에도 성적인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탁월하고도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충분히 잠을 자는 것이지만 인간은 어찌 된 영문인지 유희 거리가 필요하다.
인간은 왜 말을 하는 것일까? 이 또한 자족성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던가. 상상의 본성상 부재한다는 특질과 그 상상이 현재를 소급적용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현존의 괴리감만 불러오는 인간적 숙명은 발화의 수준에서 가장 빈번히 드러난다. 특히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다음에 말이란 것이 남는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 말의 내용물이 변명이 될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실망이라던지 후회, 아니면 이 시대에 선호되는 태도로 반성적 양태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 지를 타인에게 납득시키려 하거나 이해시키려는 의중까지. 그러나 타자에게로 수용이 결렬될 경우 자신의 불온함을 보상하기 위해 외설적인 내용을 쏟아낸다. 주체 자신도 감당하지 못할 지도 모를 교설들을 통해 또 다른 주체를 타자화시킨다. 이는 니체의 말에 적절히 반영되어 있다. "관능에 대한 가장 심한 독설은 성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나 금욕주의자들로부터 나오지 않고,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었지만 될 수 없었던 자들로부터 나온다." 이로 말미암아 주체가 추구하는 내재적 기준이 외화된다는 건 그 사람이 항상 부재함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관계상의 부적절함을 현전하는 질시는 초자아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즉 금지적 명령을 아주 충실히 수행해 낸 결과물일 따름이며 동시에 몰개성적 자아를 반증한다.
개성이라는 자족성을 구현하는 개념이나 또는 이미지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모든 것들을 신경증적일 만큼 역설적으로 보려고 하게 되니 개성의 자취를 찾는 것도 무의미해질 따름이다. 하이데거적으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탈존하게 되면 존재 역운이 열어 젖혀지기라도 할까? 죽기로 마음 먹었던 사람은 그전에 자신이 고수하던 삶의 방식을 다시 되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극단적으로 충동적이게 변모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철학에 윤리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부재하진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자신의 내부에 똬리를 튼 동기를 제거시킨다고 한들 담화의 질서는 주체의 외부에 존재한다. 후설의 무전제성? 이는 지적 무관심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러한 충실성으로 인해 생긴 결과에 대한 보상이자 지금껏 비열한 전략이라 치부했던 행위를 어떻게 바라봐아야 할까. 여전히 아무런 답을 세우지 못해 같은 질의만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사적인 준칙을 세우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타인에게 가혹하게 굴지 않기 위해서 정신이 불쾌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노력하는 것과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몹쓸 존재라며 부적절한 암시를 일부러 주는 것이다. 이 또한 여러 의도가 있기에 해보려는 부질없는 짓들 중 하나인데, 솔직하게 우울증자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니체에게서 "심리학자가 무엇이라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도외시해야 한다."라는 말을 읽고서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도 내가 원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려고 하거나 아니면 이미 미쳐 가는 중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