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고찰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Dec 27. 2021

행복의 방법론

관계의 역학

 생각해 보건대, 행복은 총 3가지 정도로 갈무리되는 듯하다. 첫 번째는 '대상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물질에 기초해 있건 아니면 관념적이건, 어떤 대상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흥미를 얻는 건 만족스러운 일 중 하나이다. 존재의 이유조차 불분명한 모호한 세계에서 모호함 자체에 대한 탐구는 쓸데없이 소모되는 정신적 에너지를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운이 좋다면 그 모호함을 제거시킬 수도 있게 된다. 그로써 인간은 정신적 긴장을 해소한다. 이는 인간성의 조건을 구성 짓는 '정신성' 자체에 대한 향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첫 번째 경우인, '대상 자체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일보다도 훨씬 더 어려워 보이는데, 그것은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다. 흔히 불교의 관점에 대해 한 번 즘은 들어봤을 텐데, 어떤 뉘앙스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언컨대, 이는 정신적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추구하는 바를 체념해 버리면서 얻게 되는 안정감과 몹시 유사하다. 즉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태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염두해야 하며,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공허를 체현하지만 동반된 여러 징후들을 함께 산출하게 된다. 곧 무기력과 나태 속에서 안식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 숨은 붙어 있음에도 죽은 상태이다. 무의식적 징후들은 이러한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나마 마지막 사안은 어려움이 따르긴 하되, 위의 두 가지 방법보다야 훨씬 더 쉬워 보인다. 그 까닭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취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은 연을 쌓는 일이다. 그러한 인연은 나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며, 비슷한 취향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내가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깊이 있게 통감해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뛸 듯이 좋아해주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오래된 친구가 그러할 것이며 가족이 그렇고, 또한 연인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좋은 벗이란, 즉 주체에게 안정감을 주는 타자란 주체의 정체성을 보증한다.


 우선적으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안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대상 자체에 대한 앎'-이제 '고찰'이라고 부르겠다.-은 기본적으로 꽤 명석한 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지성이란 학습에 필수적인 정신적 역량이며,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인지 그리고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인식을 구축하는 총체적 작업을 일컫는다. 이것이야 말로, 니체가 말한 바, 창조적 욕구의 실현이자 매 순간 새로이 굴러가는 수레바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식들 간의 모순을 최소화하려는 논리적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 대해 가장 중히 여겨야 할 정신적 소양은 '의심'이다. 학습된 지식들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지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이해들, 즉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조차도 과연 명석판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러한 과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도 내포하기에 일종의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옳다는 확실성 속에서도 그 확실성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물고 늘어져야 하며, 그 의심을 자의적으로 반증하는 작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편향에 빠지고 현실을 왜곡하여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렵지 않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이를 피하고자 부단히 애쓰며, 진부한 반복에 쉽게 지친다. 인간의 본성상 '의심의 부재'란 근본적인 오류이다.


 두 번째는 사실 잘 모르겠다. 만약 모든 것들을 다 비워내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서 이야기나 들어보고 싶다. 분명 마음을 비워내는 일은 안정감을 줄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본인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을지언정 무의식적 징후는 비워낼 수 없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박학한 무지와는 반대로 무의식은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에 따라 내가 답을 얻고자 원하는 것과는 꽤 동떨어져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징후는 그 사람이 더 이상 욕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특히 무언가 바라는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직관력과 사변력이 굉장히 부족한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아주 쉽게 낙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관은 맹목적이다. 앞서 부정성의 일종인 '의심'의 부재한다는 것과도 일맥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부정성을 감내하지 않은 채로 낙관적이다. 엄밀하게는 욕망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 부정성을 감내할 의지가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편이며, 그럴 경우 대체로 본능적 향락이 지배적인 정서가 된다. 그렇다면 이 낙관은 언제 부서질까? 향락이 유지되는 동안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간단하게도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갈 시에 금세 무기력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비이성적이게 된다. 그리고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그 결과는 자기파괴성을 몸소 실현하거나 아니면 야만성으로의 귀결이다. 사실 이는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벌어진 슬프고도 잔인한 진실일 뿐이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감내해야 한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광적일 따름이다.


 마지막으로는 '관계'에 대해서이다. 물론 라캉의 <세미나>에 적힌 대로 좋은 관계를 도모하는 방법이 아닌 이미 일그러진 관계에서 광기에 접근하기까지의 경로에 대해 적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에, 그리고 생각보다도 타인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고 관심을 갖지 못하기에 서로를 너무나도 쉽게 오해한다.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한다. 유연하게 관계를 맺기란 몹시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떻게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관계란 중요하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대로 좋은 관계를 통해 존재의 애매함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며, 앞의 두 가지 방법보다야 훨씬 더 쉽게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 이것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관계란 주체를 확실하게 보증하는 일인 즉슨, 한 문장 정도로 축약해 보자면 "타자란 주체의 정체성을 보증하는 표상"이다. 밀란 쿤데라가 쓴 소설 <정체성>에서는 주인공이 한시도 쉬지 않고 혼란스러워하고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불안의 종지부를 찍으며 안식을 찾는 곳은 다름 아닌 그녀의 존재를 보증해 왔던 타자의 품 속이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몹시 난처한 심리적 행동 양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현시대에 통용되는 정언이기도 하며 동시에 만인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행하는 행동 중 하나이다. 이를 달리 말해보면 좀 더 의미심장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부단히 애쓴다. 얼마나 지신이 괜찮은 사람인 지를 알리려 하며, 자신이 괜찮은 일을 하고 있거나 또는 그런 일을 앞으로 할 것이라고 말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타인에게 믿음을 구걸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일이 아무리 현실 감각을 벗어난, 그러니까 '불가능'해 보일지언정 이유 모를 도취감에 젖은 채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당차게 말한다. 자신은 충분히 무언가를 즐길만한 사람이라고 보여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적 양태는 '고찰'이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단순하게 어떤 대상 자체를 향유하는 것만으로는 존재의 확실성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겪는다. 이를 넘어 되레 흥미를 갖는 것이 부차적이게 됨으로써 역치된 믿음을 형성하기까지 한다. 일단은 흥미를 가져본 적이 있었는 지를 먼저 물어야 하겠지만.


 생각해 보건대,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아주 잘 해내고 있다며 주변에 떠벌리는 것만큼이나 부족해 보이는 것은 없다. 여기서의 '부족'이란 자족성의 결여 그 자체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나에게 아주 치명적인 결함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타인과 적절히 유대할 수 없다는 문제를 초래한다. 그러나 구태여 이것에 대해 더 생각해 보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좀 거창하게 적어보자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던 존재가 유의미하다고 믿고 있는 그 어떤 것을 통해 확실성을 획득하며, 단연코 정당화된 적이 없었던 존재가 그 자리에서 만큼은 우상화된다. 그리고 자신이 유의미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이 갖거나 이룬 것을 얻지 못한 타자를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치부하기에 이른다. 타자에 대한 멸시와 질타 그리고 조롱 섞인 말 따위를 통해 우월성에 다다르고, 그 우월함이 보증하는 것이 곧 정체성의 지표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서의 2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우월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보다 못한 타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고 나머지는 언제나 그렇듯이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저서 <전체성과 무한>에서 타자를 수용하는 방식으로서의 '가르침'에 대해 말했는데, 분명 '가르침'이란 것은 인류사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에도 지대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 오류란 '낯선 타자'란 수용의 대상이자 동시에 '자신보다 못한 대상'이라고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낯섦'이라는 이질성을 제거함으로써 유대하기를 소원하지만 그 근본은 권위에로의 복속이다. 그렇다면 권위적 행태가 옳지 못한 일일까? 모든 탈권위적 시도는 당위적으로 요청되어야만 하는 인류의 숙제인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권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러한 권위의 유래와 그 정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앞서 자족성이 끊임없이 결여되고 있는 지점과 '권위'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일단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에 따른 정신적 긴장과 육체적 피로는 불가피하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한데, 그것은 자신이 열렬히 수행하고 있는 '어떤 일'이 몹시 무의미해야만 할 것이다. 그 '무의미함'이란 단순히 본능적 요구만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자의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이한 의무이자, 시시각각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는 내면의 암시로서 구축된다. 그리고 축적되는 피로감은 매 순간 역치를 갱신할 것이다. 즉 무의미함의 악순환은 매 순간 항상성을 부지불식간에 저해시킴으로써,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적개심을 체화하게 된다. 에리히 프롬이 자신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언급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적개심은 공공연한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적개심은 합리화된 채 은폐되어 있다." 굴종과 자신에 대한 선망을 종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이며 의미를 갖는다.


 '초자아의 자기 징벌적 측면', 이는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일을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자신을 몰아세우는 권위적 측면이다. 지젝의 말대로 인간은 스스로 행복을 파괴시키는데 아주 탁월한 재주가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주체는 자신에게 내재화된 규율을 통해 타자를 수용한다. 간혹 타인에게 매몰찬 조언을 건네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타자를 대하는 방식은 곧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곧 학습된 외재적 질서로서, 만인이 동경을 마다하지 않으며 만인에게 적용되고 있는 관성, 그러나 결코 그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접근할 수 없는 환영적인 것이기에, 만인에게 근본적인 소외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소외된 주체는 그러한 행태의 무제한적인 반복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뿐더러 인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갖는다. 여담으로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화를 내며 온갖 현학적 수사를 곁들여 행태를 지적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지극히 사소한 한 개인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시 앞선 언급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왜 '고찰'이라는 방식을 따르기는커녕, 이것의 방법론을 생각하기조차 꺼리는 것일까? 이미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추구할 여력이 없기 때문인가? 이것도 꽤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다른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부재함' 자체에서 유래한다. 즉 어느 정도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칼 융이 제시한 '이마고', 즉 원형은 최초의 시발점이라 일컬어진다. 예수의 십계명을 최초의 도덕률로 제시했듯이, 기존의 방향성이 있었기에 현재의 문명이 세워질 수 있었다. 만약 이 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사소한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류는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그리고 고대 용어로써 '이마고'에는 '예정력'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곧 특정하는 방향을 추구할 시에 꽤 의미 있어 보이는 기댓값에 얻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마고, 이상적 자아는 주체와 소외를 일으키는 욕망하는 주체 사이의 간극을 접합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주체는 이를 내재화함으로써 안정감을 얻지만 자기 존재의 일정 부분을 상실한다.


 라캉이 자신의 저서 <에크리>에서의 '거울 자아', 즉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와 주변부와의 관계를 조망하는 유아기적에는 자신과 세게를 동떨어지지 않은 단일한 것으로 인식한다. 마치 거울에 비친 유아인 자신과 유아를 안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주변의 사물을 분절하지 않은 채 육체의 형태를 거울이라는 착각적 이미지로 구현하며 대칭적 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아는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자유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단일한 세계라 여겼던 것의 분열이 시작되는 지점으로서, 자유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외로움을 느낀다. 이 게슈탈트적 자기의 출현 이후에는 끊임없이 구성된다기보다는 자의적으로 구성하기에 이르는데, 그러한 대칭적 주체와 이를 관조하는 주체라는 두 측면을 통해 나의 정신적 영원성을 상징화하며 동시에 소외시키는 운명을 예고한다. 이와 같은 라캉의 견해는 상상적 존재는 유아기 시절에서부터 경험적으로 구성된 주체이지만 또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대면하고 있는 주체이자 세계와 접합함으로써 끊임없이 허구적 방향성을 견지하는 주체이다. 상상 속에서 재현되는 주체는 그저 모호한 은유에 불과할까? 이 모호함은 화이트 헤드의 명석한 통찰을 담은 짧은 문구를 통해서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적 주체는 언제나 현실의 주체를 위해 대신 죽는다." 상상적 주체는 우리가 어떤 위험한 상황을 인지했을 때 그 상황을 예견하고 회피할 수 있게 돕는다.


 라캉의 견해를 통해 우리의 행동 양식의 방향성을 조정하는 사유 작용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재가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모종의 접합점을 통해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 이 접합은 집단이 공유하는 원리이자 무의식, 그리고 만인이 결코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념적 질서이다. 그러나 이 접합점은 인간에게 있어 불편한 진실이자 사유의 맹점이기도 한 즉슨, 우리가 은연중에 아무런 제약 없이 수행하는 편향적 판단이다. 이데올로기적 질서가 사태와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자 동시에 타인을 대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실된 지점을 회복하기 위해 할 일들이나 고독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체념이 오히려 강박적 회의를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일 따름이다. 그래서 먼저 산 위대한 철학자 및 스승들은 고통을 수긍하며 감내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어린 시절에는 '고진감래'라는 말을 꽤 자주 들었었는데 요즘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지만. 아니면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는가? 고통을 긍정하지 못할지라도 유연하게 잘 넘길 수 있는 지혜를 통해서 인생 전반에 함께할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불가피한 숙명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말 자체에 대해 부정할 수 있어도 진리치에 대해선 의심할 수 있을까?


 현시대에서 그럴듯한 사회적 성공을 이룩한 복된 자들은 노력하는 삶에 대해서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했으며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조차도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동일하게 복창한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서 양 떼가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무작정 복창한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노력하는 삶에 대해 강조하기에 이르는데,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에게 동경의 시선을 넘어 과도한 찬양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찬양적 행위는 대상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자기의 존재에 허구적 가치를 더한다. 키에르 케고르의 말대로 "동경은 행복한 포기이다." 그렇다고 한들 이러한 속물적 태도를 무작정 비난하기는커녕 비판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자신이 동경하는 대상과의 동일화를 통해 더 이상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며 지독한 우울을 즐기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견해를 통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즉각적인 변화를 꾀할 수 없을뿐더러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하게 제시되어야만 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식론적인 관점이 존재론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에서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한계지점이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실재'를 마주해 있다는 것이다. 현시대의 개인의 좌절이자 실패는 곧 어느 시대에서나 통용되던 정언 명령의 실패가 아닌가.


 타자와의 동일화를 통해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가치함의 은폐를 시도하는 성향과 타자에 대한 엄격함을 종용함으로써 굴종을 통해 자신을 치켜세우는 성향은 두 가지 공통분모를 동일하게 갖는데, 하나는 '과잉된 현실'에 따른 강박이며 나머지는 '영원한 상실'에 따른 공허함이다.. 그리고 공통된 분모를 갖고 있음에도 이를 차치하고서, 분명 양분되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아마 사회적으로 용인될 법한 범주에 속해 있는지 유무에 따라 각기 다른 성향을 보인다. 즉 어느 정도의 성취감이 이 둘의 태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정신분석 담론에서 들춰내는 '관계'의 불편성이란 -지젝의 말처럼-, "자신보다 못한 자들과도 연대하며 지내야 한다는 참을 수 없는 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강박과 공허함은 온전치 못한 관계성을 도모한다. 주체가 항상 '어떤 타자'에 대하여 존재하기를 희망한다. 항상 그렇듯이 누군가에게 깊이 있게 이해받기를 바라며 조금이나마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는 항상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 '죽음'이라는, 세상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와 같은 어떤 '무'의 상태를 정초시킨다면 더없이 정합적이게 된다. 모든 것들의 상실이 곧 인간의 가장 시원적 두려움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자와의 유대는 그저 이기적일 따름일까? 자아의 정체성의 아주 작은 편린을 얻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오로지 경쟁 속에서 승리했다는 우월함에 따른 쾌감과 타자에게 복속함으로써 얻게 되는 안정적인 만족만이 정체성의 전부일까? 이러한 것들이 모두 자기연민에서 비롯되는 까닭인가? 이런 관점들도 존재하지만 이 정체성은 기이한 특질을 갖는 듯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명예로운 존속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이 애착을 갖는 대상을 위해 기꺼이 죽는 존재이다. 적대적인 것에 희생한 개인의 존재는 타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계승된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산 자들의 말보다 죽은 자들이 남긴 글귀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떤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에 자살률이 매달 새로이 갱신되고 있지만, 지젝의 입을 빌려서, "긴박하긴 하지만 파멸적이진 않다."라고 말해야만 할까? 잘 모르겠다.


 서로를 갈등 상황으로 밀어 넣고 끊임없이 혐오하며, 불신으로 가득 채워진 시대, 뉴스에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계속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금 독특하다고 할 수 있을 지라도 딱히 귀감은 되지 않는 유아론이 판 치는 인터넷 댓글창에서는 익명성 뒤에 숨은 인간의 아주 솔직한 민낯을 볼 수 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누구나 한 마디씩 운을 떼며 말을 발산시킨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가감없이 말하고 그 의견들이 사회적 제도에 충분히 스며드니, 지금이야 말로 가장 '민주주의적'인 것인가? 애석하게도 말이 넘쳐나는 사회는 비틀거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 사회가 비틀거릴수록 더 많은 말이 창발한다. -변증법이란 참 많은 것들을 이해시켜 준다.- 이는 라캉의 말대로 욕망이란 좌절되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항상 성적인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리비도가 폭발하는 사회일 따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의 실패는 곧 '말'이라는, 본질적으로는 '보상성'이라는 모종의 약속으로 남기 때문이다. 즉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의 가치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말이란 감내해야 할 부정적인 것 중에서 가장 부재하는 것의 최소 단위일 뿐이다.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의 변증법'에서 아름다운 영혼이란 자신이 극구 부정하는 질서를 부정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몹시 문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인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너무 적대적이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 문제가 곧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동력, 즉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는 꽤 저명한 사람들이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 속에서 쉽게 드러나는데, 그 예시는 '엘론 머스크'가 적당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환경론자이다. 그가 화성에 제2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상적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인해 불모지가 될 것이라는 부정적 예견에서 비롯되었다. 분명 어느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과도한 상상이다. 게다가 그는 명석한 두뇌와 강한 실천력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얻음으로써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즉 의지란 부정한 것의 부정이며 부정과 긍정의 순환 운동, 내지 '자유의 변증법'이라 불리는 개념은 더 큰 자유를 향한 열망이기 이전에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날지도 모를, 즉 과거 또는 미래의 상실에 대한 보상이다.


 이러한 정신분석적 관점은 개인과 개인의 미시적인 관계에서 어렵지 않게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젝의 말대로 이러한 관점이 전체 구조와 유사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새로이 알아가야 할 부분이다. 사실 헤겔 책은 안 읽어보고 헤겔을 인용한 몇몇 지성들의 문장과 검색해서 찾은 내용들로 "변증법"이란 개념을 쓰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더불어 신체적이고 정신적 한계를 단순히 의지의 병리적 측면과 그에 따른 징후가 아닌 정확하고 확실하게 집어낼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사람들을 좀 더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길지 않으면서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있으니,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축적되어 이 글도 적게 되었다. 물론 나는 내가 제시한 것들 모두 멋지게 실패하는 중이다. 딱히 행복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사실 제목이 글의 취지와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으나 내 눈엔 가장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은데 어찌하겠는가. 양해해주길 바란다. 무언가 더 적어야 할 것 같은데 생각 정리도 안 되고 여력도 없고 게다가 몇 시간 후면 또 영혼을 갈아 넣으러 가야 한다. 잠들기 싫다. 어영부영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직한 자들의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