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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24. 2022

인간적 불운

지식 체계와 주체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주어진 3가지 불운으로, 생리적 결핍,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지적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육체적 고통에 사로 잡힌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자지 않으면 졸리고 배변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일상을 지속하기 힘들다. 생에 있어 전반적으로 발생할 결핍에 시달리며 이를 채워주지 않으면 금세 무기력해지거나 자칫하면 죽음에 이른다. 두 번째로는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재해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그 광막한 힘은 때로는 신비롭지만 때로는 기이하고 두렵다. 나약한 신체를 가진 탓에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금세 위태로워진다. 마지막으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다. 흔히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 적절하게 유대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의무적으로 요청되며 사회의 조화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감내하면서 타인을 배려한다. 그러나 적어도 앞의 주장에 대해, 그러니까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 없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당위성이 없다. 분명 다수가 전적으로 동의할 법한 견해인데, 이는 경험적으로도 적절히 이해 가능하다는 점을 근거로 충당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근거에 당위성이 있다. 즉 여기서 당위성이라 함은 고독을 견딘다는 것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 착안했을 때 인간은 사회성을 갖추어야 할 필요성이 성립한다. 모든 변증법적 진술이 그렇듯이 어떤 견해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되기 이전에 그러한 견해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는 지를, 즉 모든 주장들이 그러하듯 일련화된 추정에 근거해 있으며 그 근거란 선재된 부정성이 우선적으로 작동하는 까닭이다.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 모든 것들이 '부정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주어져야 한다. 특히 이 '방편'이나 '해결책' 따위로 부르는 것은 심리학적 관점이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심리학과 철학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예방적이고 모범적인 답안을 심리학이 제시할 진 몰라도 고독 자체가 무엇인 지를 묻진 않는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 이는 철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이며 허무맹랑하다는 대중적 의견이 만들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주체가 세계에 던져진 이후로 봉착하는 여러 난관들은 구태여 유아기적의 미숙한 상태라는 '실존적 무기력'이라는 생경하고도 불가피한 경험에 사로잡히지 않더라도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구태여 이러한 경험에 대해 진술하지 않더라고 살면서 한 번 즘은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오지 않던가. 특히 고독한 상태는 삶에 있어 전반적으로 지속되는 불운 중 하나인데, 그렇기에 그러한 경험들이 불가피한 것처럼 타자에 대한 의존 또한 언제나 불가피한 일이 된다. 이에 따라 체화되는 문제는 명징한데 그것은 의존과 의존에 따른 병리적 양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되묻기를 의존적 양태가 정녕 문제적인 일인가? 이를 문제라고 치부하려면 어떤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 세계에 홀로 존재하며 자신의 운명을 전적으로 홀로 감내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의 어려움에서 착안한다. 더해서 이를 어렵게 수긍한다고 한들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는 적절하게 유대할 것을 자의적으로 요청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이는 '완벽한 고독'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구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불운이다.


 우월함에 대한 과도한 동경과 그러한 타자의 존재는 인류가 지금껏 존재해 오며 어떤 뛰어난 일을 해낸 사람들을 기념해 온 방식이다. 인간의 역사란 이 과정의 반복이며 역사의 한 획 속에서의 시대정신은 그 시대의 선망의 대상이 아니던가. 사실적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면 심적으로 퇴행하기 마련인데, 그 과정 속에서의 좌절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방편 중 가장 쉽고도 익숙한 해결법은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문제를 의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빈번히 인간은 동경의 대상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양도하며 그 대상의 교조화하기에 이른다. 특히 정치적으로 이것이 가장 적나라하고 노골적이게 드러나는데, 흔히 정치인들이라는 족속이 대중들을 상대로 표를 얻는 방식의 일환으로 사용되는 것이 역사 속 인물의 인간성 또는 업적을 숭고하게 포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가 전혀 이질감 없이 수행되는 이유는 어떤 집단의 존속을 위해 대의를 꾀한다는 이념적 발상에 치중되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발상이 지탱되고 고착화되는 방식에서 앞서 언급한 '선재성', 즉 독존의 불가능성에 방점이 찍힌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동일성 문제', 인간은 자신의 유약함을 가리기 위해 가치 있어 보이는 일 그리고 자신보다도 더 가치 있어 보이는 사람과 유대하기를 소원한다. 반면 지젝은 부정성-여기서는 자기보다 못한 자들-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이는 본능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박물학자였던 찰스 다윈이 22살이 되던 해인 1831년에 비글호에 승선하여 세계를 돌며 진화론의 발판이 될 증거들을 수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글호 항해 목적은 성서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러니까 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되레 현재에는 그 권위를 박탈하기 위한 가장 큰 위업이 되어 있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한 점은 그에 대한 반발로 다윈은 세간의 비난을 받게 되었는데 다윈은 단연코 신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다윈의 주장은 '신의 피조물 중에서 인간이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다윈에 대한 반발은 신의 지고하고도 영속적인 사랑을 영위하는 인간이 원숭이 따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별안간 이러한 의존과 마찬가지로 의지를 요청하는 것 또한 모종의 결핍에 연원 해 있는데, 양분되는 이 두 견해는 동일하게 불가피한 현실을 공통분모로 삼는다. 동일한 맥락 속에서 옛 지성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라 불리는 것을 강구했으며 그 작용면으로서 '영웅 신화'가 집필되기 시작했다. 영웅 신화, 즉 영웅이라 칭해지는 사람은 분명 어떤 집단의 존속에 방해가 될법한 요소를 제거하거나 해결한 사람이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마저도 기꺼이 희생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 치의 과장 없이 이는 인류가 존속해 온 방식이며 우리가 과거에 살았던 훌륭한 사람의 존재와 업적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 기념하는 이유이다. 또한 분명 우리는 그 문명 속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영웅의 행태는 다수에게 절대적이고도 맹목적이기까지 한 지지를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질서, 시스템, 패러다임 그리고 이데올로기 따위로 부르는 것은 지지를 기반으로 삼는다. 어떤 이념 내지 사상 따위가 시간을 뛰어넘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식과 문화의 담지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몹시 새삼스러운 발언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반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며 양적 합의라는 미명을 따른다. 이런 측면에서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주체를 의존적이게 만든다고 한들 충분히 유효하고 합당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병리적이라는 수식은 진부한 것으로 남는다. 정녕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이념의 양가적 측면으로 보이는데, 즉 하나를 이루면 하나를 잃게 된다는 일종의 등가 교환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물론, 이 장소에서는 최소한으로 2가지 정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는 '이성의 간지', 즉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진술이며, 나머지 하나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빈약함을 충분히 견딜 '영웅적 의지'이다.


 사회라고 불리는 개념의 존립은 애당초 인간적이고도 형이상학적 불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간은 조화라는 대의를 위해 어느 정도 합의를 유지하고 종용하며 이를 향유하지만 정신 분석에서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향유의 조건으로서의 환상이란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은폐하는 구조라는 것을, 즉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탄생과 더불어 운명 지어진 불운에 의해 정초지어졌다. 마찬가지로 신화의 탄생의 이면에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요소가 놓여 있다. 하지만 주체의 관점에서는 탄생의 우여곡절을 망각한 채로 그저 해괴한 이야기쯤으로 치부해버리는 맹점이 존재하며, 더군다나 이러한 탈존에 관한 철학적 논점과는 별개로 그러한 합의의 유효성을 상실하게 되면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인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게 된다. 묻기를, 탈존이란 실존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자유에 관한 모든 외침이 역설적인 까닭이자 동시에 현시대의 부조리함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불만을 최대한 묵인해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아무리 사소하고 소박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언정 그것마저도 없다면 삶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함도 잃게 된다.


 라캉이 칼 융을 '변절자'라고 칭하며 노골적으로 깎아내린 까닭은 칼 융이 프로이트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프로이트와 상반된 입장인 지식 체계와 주체의 융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라캉이 자신의 저서 <에크리>에서 보여준 박학함은 지식이 생산하는 권위와 주체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권위가 조건 짓는 권력과 주체의 상관항을 파악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면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라캉적 관점이 조명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차치하고 감히 소견을 달아보자면, 굳이 심리학과 역사가 정신분석의 반박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을 진 의문이다.


 지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전파해 온 인류의 역사가 승자의 기록인 만큼, 역사란 권력을 대체해 온 역사와 다름 아니다. 엄밀히는 기존의 질서가 대체되는 역사의 시기에는 그저 지식이 대체될 뿐이었으며, 권력이란 또 다른 지식의 소유자에게로 이행되는 과정이다. 케인즈는 아무리 멍청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엉터리 삼류학자로부터 얻은 이념을 토대로 삼는다고 했었는데, 이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과는 반대로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항상 유지되어 왔다. 즉 권력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며 이를 부정하기 위한 시도가 무의미하진 않더라도 몹시 위태로워 보인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 과정 속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계급 구조가 파생된다. 간혹 전환점이 마련되었을 때 전방위적으로 퇴행이 발생하는 것은 변증법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며 구조적 조건 하에서 이러한 전환의 발생은 확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진통 속에서 주체로 거듭난다는 말이 무색해질 따름인 것이 애당초 대의란 또한 마찬가지로 이해관계의 일부인 까닭이다. 여기서는 거듭 두 가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하나는 좌파적 철학 관점에 내재된 문제로서 혁명을 위해서는 '중산층의 몰락'을 기대해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더욱 큰 문제는 현시점의 좌파를 표방하는 권력자의 꿈은 진실되게 해방을 꿈꾸는 것이 아닌 '권력욕에 대한 솔직함'이다. 그러나 그 전초 단계인 탈존은 오히려 더 큰 악재를 불러올 지도 모른다. 지식 체계가 없는 상태인 즉슨, 정말 아무것도 없이 내던져진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은 지독한 공회전이다.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쯤 되면 '이데올로기의 다정함'을 거부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다시 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엔 해답이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이것이 불가피한 체념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융의 관점은 이미 현실에 충분히 녹여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재차 강조되기에 이르는데, 그러니까 이미 포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과포화 상태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이는 현체제의 유지가 아닌 가속화일 따름이며 되레 더 빠르게 자멸하도록 만드는, 즉 희망보단 절망의 한 축을 담당한다. '리비도가 과잉'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잉여 향락'까지, 이는 현시대의 무지몽매함 덕택에 종종 주체의 의지 내지 통념적으로 자신감 따위로 읽히지만 여기서 '의지'란 타자와의 유대 속에서만 가능해지는 의지라는 것과 더불어 주체에겐 자신이 스스로 떠받들지 못하는 욕망의 간극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대타자는 그것을 성실히 해내는 것을 넘어서 즐기라고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항상 드는 생각으로 충분히 가능한 수준에서 일을 꾀해야만 한다. 현존하는 지식을 대체할 지식 체계를 수립할 수 있어야 전환점이 마련된다. 이는 마치 모든 것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당대의 신박하고도 해괴한 정도의 주장이 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 칭송되는 자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유산을 무작정 답습하는 것 만으로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이유이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를 통한 해체는 체제의 전복이 아닌 필요성을 대두시킬 뿐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나마 진부하다고 표현한 반복과 반복의 획책 속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공리를 아니면 공리라고 믿어지는 것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프랑스의 작가 사드가 신앙심을 이용해 인간을 착취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착취와는 별개로 아편이 마약성 진통제로 고통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 이전까지만, 이 말이 의미를 갖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말을 쉽게 입에 올리며 자신을 한껏 치켜세우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마치 자신은 탄생의 순간에 주어진 불문율 속에서 의기양양하기라도 한 듯 행동하기 전까지만 말이다. 얼마나 타당한 진 모르겠으나, 아픔에 둔감한 사람은 병이 악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병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 당장에야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현실에 대한 진단일 것이다. 물론 이것도 가치가 있다. 건강 검진은 주기적으로 받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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