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현 현암사 대표
광복 70주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국권의 회복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지성사의 부활이기도 했다. 일본의 압제 36년 내내 자유로운 말과 글의 사용이 어려웠으며 출판, 저술 등의 지식생산도 많은 부분 침해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태어난 해방둥이 출판사들은 대한민국 지성사와 같이 커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우리나라도 어엿한 70살 출판사를 갖게 되었다. <북DB> 북스타캐스트에서는 해방둥이 출판사들을 찾아가 지난 70년 앞으로의 70년을 짚어보기로 했다.(편집자의 말)
현암사는 대한민국 광복의 역사와 생명을 함께한 곳이다. 1대 조상원 대표, 2대 조근태 대표, 3대로 조미현 대표가 3대째 가업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시작은 식민지시대 경상북도청 학무과에서 공무원으로 활동했던 조상원이 1945년 창간한 <건국공론>이라는 시사 종합지였다. 해방되던 해에 만들어졌으니 모든 게 여의치만은 않았을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책바치’로서의 방향설정이었다.
1953년엔 <처세철언>이라는 책을 내면서 처음으로 ‘현암사’ 문패를 단 책이 나왔고, 이후 1960년대에 나온 <신역 사서삼경>은 유례없는 히트를 친다. 이어령의<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4)가 베스트셀러 기록을 남겼고, 박경리의 장편소설 <시장과 전장>(1965)을 전작장편소설로 출판하는 기록을 세운다. 1969년엔 우리 학자 100여 명을 동원해 우리 선조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고전 100권을 해제한 <한국의 명저>를 펴내 한국학 붐에 불을 지핀다.
현암사를 대표할 수 있는 책을 한 권 꼽으라면 1959년 펴낸 <법전>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식 <육법전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식 최초의 <법전>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반응도 뜨거웠다. 출간 동시 매진돼 정가 4천 환짜리가 다음날 6천 환으로 암거래되기도 했을 정도였다니 말이다.
그렇게 해방 후 70년이 흘렀고, 현암사의 나이도 70세가 되었다. 직원 수는 24명, 일 년 출간 종수는 60종으로 규모가 거대하다기보단 내실 있는 출판사다. 황석영의 <장길산>, <어둠의 자식들>,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 요슈타인 가더의 철학 소설 <소피의 세계>. <도덕경>, <장자> 등이 현암사의 책 중 큰 인기를 끌었다. 베스트셀러보단 스테디셀러 쪽이 많다. 최근엔 인문서들과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시리즈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서교동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짙은 회색 톤 건물 하나가 조용하니 서 있다. 건물 벽에 특유의 글씨체로 쓰인 ‘현암사’ 간판이 반갑다. 조미현 대표의 조그마한 방 곳곳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대학에서 섬유예술을 전공했고 미술작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녀의 전력이 느껴진다. 요즘도 간혹 미술 작업을 하느냐는 물음에 “그럴 새가 어딨느냐”며 웃는 그녀다. 오래된 출판사이지만 대를 이어 발로 뛰는 대표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에게 현암사가 꿈꾸고 있는 차후 70년의 비전에 관해 물었다.
큰 욕심 없이 책에만 집중한 70년
Q 현암사는 3대에 걸쳐 성장한 출판사인데요. 창업주이신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자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할아버지 회고록에 보면 ‘신의는 우리에게 목숨과 같다’고 나와요. 내 급여를 못 가져가는 한이 있어도, 직원들 급여는 반드시 챙기고 거래처 지급은 반드시 약속한 날짜에 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또, 아버지, 할아버지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밥을 먹어야 하니 방학이래도 늦잠이란 걸 자본 적이 없어요. 할아버지는 항상 부지런한 사람한테 기회가 오고 부지런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분이셨거든요. 그렇게 신의와 성실을 배운 것 같아요.
Q 현암사가 올해로 창립 70주년인데요. 이렇게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현암사가 70년 됐대도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사업적 수완이나 능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큰 욕심 부리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 생각해요. 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지 다른 짓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규모의 것을 세워놓고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Q 현암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 지금 상황은 또 달라진 것 같아요. 스마트폰과 책이 대결하는 시대에 출판업을 하고 계신 건데요. 대표님만이 품고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나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무리 우리가 그럴듯하게 포장·홍보를 해도 책 내용이 좋지 않으면 책은 안 나가요. 잘 될 책을 조금 더 잘 만들면 탄력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알맹이가 없는 걸 포장한다고 해서 그걸로 인해 책이 더 나가진 않겠죠. 세월이 많이 변해서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서 책을 대단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 같은 건 없는 거죠. 좋은 책을 만드는 것밖엔요.
Q <추사집>이 38년 만에 현암사에서 재출간되었는데요. 대표님 입장에서도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38년 만에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닐 거예요. 어느 하나만 박자가 안 맞아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잖아요. 저자가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았다거나,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작업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개정판이 나올 수 없었겠죠. 또, 그 책을 만들었다 해도 처음 책을 낸 출판사가 40년 넘게 존속해야 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낼 수 있고요. 제가 대여섯 살 때 나왔던 책을 마흔 중반이 되어서 다시 낼 수 있었던 게 저에겐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현암사가 출간해온 책들
지식, 대중 눈높이에 맞춰 제공하는 것도 중요
Q 롤모델로 생각하는 출판사가 있나요?
할아버지는 이와나미 문고를 롤모델로 삼으셨었죠. 저는 아동서 출판에 있어선 사계절 출판사를, 인문서는 돌베개 출판사를 롤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Q 현암사에서 나온 책 중에 대표님께 의미가 있는 책을 고르라면 어떤 책을 고르시겠어요?
2010년 <파브르 곤충기>를 열 권짜리로 출간한 것이요. 이런 책을 내는 건 아무 출판사나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또한, 전우익 선생님의 <사람이 뭔데>,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같은 책들이 저에게 큰 의미가 있는 책들입니다.
Q 경영인의 역할은 수익을 올리는 것이지만, 책은 돈을 좇기보단 의미를 좇는 상품이잖아요. 두 가치가 부딪힐 때 어느 쪽에 가중치를 두시나요?
어쨌든 이것도 사업이고 직원들 급여를 지급해야 하니 반드시 5대 5라고 가중치를 두긴 힘들어요. 의미 있는 책을 내기 위해선 팔리는 책을 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팔리는 책은 6할을, 의미 있는 책은 4할을 펴내면 균형이 맞춰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출판사 경영하면서 특히 어렵다고 느낀 부분은 어떤 건가요?
직원과의 관계, 작가와의 관계처럼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려워요. 우리가 만드는 게 밥솥이나 냉장고라면 그렇게 부딪칠 일이 없겠죠. 하지만 출판사는 저자가 가져온 글을 편집자가 시점이나 방향성을 맞추며 요리를 하잖아요. 게다가 책이란 게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상품이다 보니 내놨을 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받아들여질까 하는 점이 고민이 돼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게 바로 책
Q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이 세상에 꼭 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천재지변이 있거나 불치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의 평균 수명이 보장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길게 보고 사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몸은 늙어가도 끝까지 잘 살아가야 하는데, 이때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힘을 길러주는 게 책이라고 생각해요.
책 값이 비싸다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아직도 책 값이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 잔에 사천오백 원, 오천 원 하는 커피는 한번 입에 들어가면 끝나는 거잖아요. 만오천 원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난다면 이것만큼 남는 장사가 없는 거죠.
Q 70주년 기념 전시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밖에 준비하고 있는 행사가 있나요?
현암사 70주년 맞춰서 한국학 연구자인 최준식 교수님이 쓴 한국인에 관한 책이 나올 예정이에요. 현암신서 첫 권이 윤태림 선생님의 ‘한국인’이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한국인을 조망해보자는 의도에서요. 잘 진행되면 70주년 전시 시작하는 날 책이 나올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현암사의 차후 70년에 대한 비전을 그려주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현암사가 좀 잘 됐으면 좋겠는데(웃음). 다각도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해요. 도서전에 나가서 독자 반응을 들어보면 현암사는 너무 어려운 책만 내는 출판사 아니냐는 인식이 있더라고요. 지식을 어렵게 전달하기보다는 대중적인 눈높이에 맞추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엔 학술적이고 어려운 책들도 있어야 하지만 독자와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책도 필요하잖아요. 책이라고 늘 교훈만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세상엔 유머가 담긴 재미있는 책도 있고, 허를 찌르는 책도 있고, 오싹하게 하거나. 실질적인 지식을 주거나, 역사의식을 주는 책도 있잖아요.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가르는 대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긴 안목을 주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북DB 2015.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