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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Mar 14. 2022

'나만 아니면 돼'... 메르스를 보는 당신의 눈


늘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던 거리가, 차도가, 지하철이 휑하다. 일터로 떠밀려 나가는 이들은 마스크로 무장한 채 서로에게 팽팽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언뜻 인류 멸망을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인가 싶지만 이것은 메르스가 덮친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6월 16일 현재 4차 감염까지 진행된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 수는 19명으로 늘어났고, 확진자도 154명에 이르렀다. 사태의 심각성 탓에 전국 유치원과 학교 475곳이 휴업을 결정한 상태다(그나마 6월 12일 2903곳에 비하면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6월 한국 관광을 취소한 중국인 관광객이 10만 명에 달하고, 홍콩 관광객 1만2000명이 가입한 600여 단체의 관광상품이 모두 취소되는 등 외국 반응도 심상치 않다.

상황은 이렇게 위급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메르스 유행 초기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낙타와 밀접한 접촉을 피하세요",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 또는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 섭취를 피하세요”와 같은 황당한 대처법이다. 생사가 갈리는 위급한 사안에 대한 부정확한 정부 대처는 전 국민의 농담 소재가 되기도 했다.

신뢰 가능한 콘트롤타워가 부재한 가운데 초기에 감염자가 입원했던 병원과 동선에 대한 정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불안감이 커지고 병을 확산했다는 비판도 있다. 한 설문조사에서 메르스 관련 정보가 신속하고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는지를 질문한 결과, 88.6%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인터넷상에는 ‘바셀린을 콧속에 바르면 메르스 바이러스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유포되면서 병을 키우고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설상가상의 상황에 놓여 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지금의 이 상황,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아마 정유정의 소설 <28>(2013)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화양’이라는 도시에 원인 모를 ‘붉은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퍼지면서 시작된다. 나중엔 도시 전체가 마치 불가촉 대상처럼 격리되고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인다.

여론은 화양 봉쇄의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른다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전 국민을 종교적 수준의 공포와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각 언론사와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가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빨간 눈의 서울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화양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의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에겐 화양과 빨간 눈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 <28> 중에서



이런 상황 속에서 <28>의 주인공인 수의사 서재형은 자신의 생명 또한 위태롭지만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소설 <28>이 강조하는 것은 동물이나 인간을 막론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내 생명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생명, 나아가 다른 생명체의 생명마저도 귀하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자세다. 우리가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이 바탕이 될 때, 그것이 연대의식으로 발전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운명에 당당히 맞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역시 페스트라는 거대한 전염병이 뒤덮은 알제리의 도시 오랑을 그리고 있다. 느닷없이 쥐떼가 출현하는 불길한 징조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사상자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늘어가고 결국엔 아무런 논리 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지옥 같은 상황에 놓여 도시는 격리되기에 이른다.

이 때 오랑을 우연히 찾은 프랑스의 신문기자 랑베르는 처음에는 자신이 운 나쁘게 오랑시의 운명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며 탈출할 방법을 찾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오랑시민들과 함께 재난을 겪어나가면서, 랑베르는 자신이 처한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랑베르는 탈출한 방법을 찾은 후에도 도시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선생님 편에서 어떻게든 이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 말고 이번 전염병에서 내가 배운 것이라고는 아직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언하건데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두루 알고 있지요)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다른 사람 낯짝에 대고 숨을 내뱉어서 그자에게 병균이 들러붙도록 만들지 않으려면 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단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 <페스트> 중에서



그렇게 10개월이 지난 후 의사 리유를 포함한 시민들의 끈질긴 방역 활동 끝에 오랑은 페스트로부터 해방된다. ‘부조리’의 정신을 주장한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학가 알베르 카뮈는 이 작품에서 역시 페스트가 무조건적으로 퇴치될 것이란 희망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처한 운명을 수용하고 부조리에 저항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메르스라는 재앙을 두려워만 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난을 응시하고 대처해나가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듯 말이다.



소설로도 제작된 영화 ’연가시’ 포스터


(제작 : 오존필름 / 제공.배급 : CJ엔터테인먼트)



이밖에 인간을 숙주로 삼는 연가시라는 기생충이 창궐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원작 영화를 소설로 옮긴 <연가시>(박이정, 2012)나 에볼라 바이러스와의 사투를 극화한 <핫존 : 에볼라 바이러스 전쟁의 시작> 등의 책이 다시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이다. <연가시>는 정체불명의 전염성 질병 하에서 희생양이 되는 보통 시민들의 모습이 우리 현실과 확연히 겹쳐지는 작품이다. 한편 미국의 논픽션 작가 리처드 프레스턴이 꼼꼼한 현지 조사, 실제 인물 인터뷰, 방대한 과학 데이터 등을 거쳐 완성한 <핫존 : 에볼라 바이러스 전쟁의 시작>은 1989년 미국에서 전개된 에볼라 바이러스 차단 작전으로부터 교훈을 전달한다.

메르스와 같은 재앙은 아무런 이유 없이 불시에 닥쳐올 수 있기에 위력적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메르스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고통 가운데 우리는 함께 서 있다. 그야말로 카뮈가 <페스트>에서 묘사한 것처럼 부조리하다. 하지만 너와 나의 운명이 무관하지 않은 운명공동체로서 서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조금 구체적이고 확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나만 아니면 돼’ 하고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연대’와 ‘실천’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수많은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


북DB 2015. 6. 17

http://news.bookdb.co.kr/bdb/IssueStory.do?_method=detail&sc.webzNo=2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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