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만난 건 1997년 9월쯤이었어. 내 집이 안양에서 인천으로 급하게 이사하고, 예정에도 없던 전학으로 인생 첫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게 그쯤이었거든. 우린 1학년 5반에서 한 명의 반 친구로 만났었지. 나는 내가 2반도, 4반도, 6반도 아닌 딱 5반으로 배정된 게 참 좋더라. 나는 짝수보다 홀수를 더 좋아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말이야.
전학 온 첫날, 처음 보는 선생님이 나를 처음 보는 반 친구들 앞에서 소개를 해주었어. "안양에서 온 정혜진이라는 친구야." 나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생경하게 느껴지면서도 참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안 양에서 차갑고 불친절한, 자주 체벌을 일삼는 담임선생님에 질려 있었는데 새로운 선생님의 따스한 목소리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 버렸어. 이곳에서의 첫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었지.
아무튼 자기소개를 하고 중간쯤에 앉아 수업을 듣던 나는 문득 막막한 생각이 들더라? 이미 다들 친해져있을 텐데 나는 거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누구랑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수업 시간 내내 애들 눈치만 살피느라 식은땀이 났던 거 같아. 다행히 첫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나에게 관심을 가져준 몇몇 친구들 덕분에 그날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어. 너는 쉬는 시간에 내게 찾아온 손님 중 한 명이었지. “안녕? 나는 정희진이라고 해~!”라고 밝게 배시시 웃으며 말하던 너의 모습. 그땐 너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
신기하게 내 바람대로 우리는 정말 금세 친해졌어. 사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내 여덟 살 인생에서 어떻게 너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기억 속 우린 참 많이 붙어 다녔어. 우리 엄마도 네 안부를 늘 물어볼 정도였어. 반 친구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우린 누가 뭐래도 서로의 단짝이었고 말이야.
너는 도수가 꽤 높은, 그래서 쓰면 눈이 엄청 작아지는 안경을 쓰는 아이였어. 다른 사람 앞에서 안경 벗는 걸 부끄럽다며 질색했었는데, 그래서 안경을 닦을 때면 고개를 돌려 최대한 빠르게 닦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써버리곤 했지. 너는 왼손잡이기도 했어. 왼손잡이 친구는 처음 봤어. 네가 왼손으로 글씨를 쓸 때 엄청 신기했어. 비록 삐뚤빼뚤한 글씨여서 잘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교환일기장에 네가 정성을 다해 편지를 쓴다는 사실만은 삐뚤빼뚤하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히 좋았어 나는.
학교가 끝나면 주로 너네 집에 가서 놀았던 거 기억나? 나는 너네 집에서 노는 게 정말 좋았었다? 이제 와 말하지만 너네 집은 우리 집보다 훨씬 넓고 낮에는 포근한 햇살이 들어오는 집이었거든. 너네 집에는 그 당시에도 컴퓨터가 있어 고인돌이란 게임도 할 수 있었고. 그때 나는 컴퓨터가 뭔지 몰랐지만 어쨌든 한 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고인돌 게임을 같이 할 수 있단 사실도 좋았어. 그러고 보니 그땐 우리 집만큼이나 자주 가던 너네 집이었는데, 정작 너는 한 번도 우리 집에 데려오지 못했던 거 같네. 이제 와 변명해 보자면 그럴 수가 없었어. 우리 집은 정말 작고 작아서 너무 부끄러웠어.
초등학생 때 그렇게 붙어 다니던 우리는 학년이 올라가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사이가 점점 소원해졌어. 서로의 근황을 묻는 일도 뜸해졌고. 우리는 더 이상 달리기를 같이 하지도, 고인돌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지. 누가 잘못을 한 건 아니었어. 단지 각자 학교생활에 바빠서, 새로운 단짝 친구가 생기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어. 고등학교를 갈 나이가 되었을 때쯤엔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어 복도에서 마주쳐도 우린 어색하게 눈 인사를 나눴고, 나중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살며시 눈을 피하곤 했던 거 같아.
우리 우정은 점점 옅어지고 희미해져서 내가 30대가 될 때까지 너에 대한 기억을 한참 동안 잊고 있었어. 얼마 전 <어린이라는 세계>란 책을 보고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는데 문득 네가 떠오르더라고. 내 유년 시절에 끊임없이 웃음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던 네가... 어렸을 때 너와 나눴던 우정을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되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는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더라고. 누군가와 웃음과 활기, 일상을 공유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매일 같이 깨닫고 있지. 어른이 되어 누군가와 진한 우정을 나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종종 하곤 해.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때 나의 마음 한 부분을 기꺼이 떼어주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그때 나와 우정을 기꺼이 나누어줘서 고마워 희진아. 네가 순수하게 다정함을 아낌없이 나눠준 덕분에 2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스해져. 이제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지만, 나는 종종 우리의 여덟 살을 추억하려 해.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나의 친절과 다정함을 나눠주는 연습도 하고 말이야, 네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