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직업에 따른 차별과 오랜 통념에 똥침을 날리자.
얼마 전 구매 상품 이벤트로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가 그려진 딸기우유였다. 딱히 우유를 사서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용기한이 다가와 공짜니까 받고 겸사 다른 먹거리도 살 요량으로 동네 편의점에 갔는데 해당 상품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없는 상품을 왜 사은품이라며 생색내나 싶어 마음이 상했지만, 포기하는 대신 근처 다른 지점에 전화해 해당 상품이 있는지 물었고 하나가 남았다기에 굳이 받으러 갔다. 별생각 없었더라도 이쯤 되면 성격 상 막상 칼을 뽑았으니 어떻게든 썰어야, 아니 받아야 하는 게 되어버리곤 한다.
“아이가 꼭 먹고 싶어 했나 봐요.”
해당 편의점에 들어가 딸기우유 위치를 묻자 친절한 점원이 직접 매대에서 찾아주며 웃었다. 아이가 원하는 걸 해주는 좋은 아빠라는 취지로 말했겠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처럼 고개를 저으며 ‘아니염, 제가 먹을 건데염.’이라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제 나는 그런 오해를 받을 나이의 ‘아저씨'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직 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성인 취급, 혹은 대접은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 내부터, 친목 모임, 일터에서까지 전방위에서 이루어져 어디에서도 피할 구석이 없다. 일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대표님', '사장님', '(음악)감독님', '작곡가님', ‘작가님', ‘선생님’, ‘선배님'이라 호칭해서 나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나는 어느 모임도 대표하지 않고 사장도 아니다. 공적인 관련 자리가 아니라면 작곡가나 작가 호칭도 굳이 성이나 이름 뒤에 덧붙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감독이나 선생, 선배 같은 칭호보다는 이름이나 밴드명으로 불러주는 게 편하다. 이런 호칭들은 아무리 자주 들어도 매번 어색하고 불편해서 가능하다면 정중하게 편한 방식으로 호칭해 주기를 청하거나 권하기도 하지만, 수정되지 않거나 다음에 만나면 다시 같은 호칭으로 불리곤 한다. 그럴 때 기분은 환율이 낮은 저개발 국가를 여행할 때 고된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를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받으며 현지인에게 느끼곤 했던 마음 한 켠 미안함, 불편함과도 일면 흡사했다.
내가 겸손해서가 아니다. 단지, 직위나 나이는 존대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고, 기준이 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스민 상하 관계가 불편하고 마뜩잖다. 평등한 관계에서는 굳이 대표, 사장, 감독, 선생, 선배 같은 호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떤 사람 앞에서도 내가 그렇게 불릴 윗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대체로 내 주위 지인들은 나를 이름이 아니면 '박가야, 라이너야, 훈아'라고 부르는데, 그럴 때 나는 그들에게 편한 존재구나 싶어 안정적으로 상대와 선을 잇게 된다. 친한 관계가 아니라도 'ㅇㅇ씨'면 충분하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첫 만남에 나이를 묻고 '내가 형이네, 언니네'라며 서열을 정한다. 나이를 알게 된 순간 겸손해지거나 낮춰 보는 문화는 구한말이 아득한 21세기에도 여전하다. 한국에서 살면 외국인들도 나이 서열 문화에 금세 적응해 자기들끼리 형, 동생을 정하고 존대, 반말하는 걸 방송으로 보자면 기이하다. 나이 적음이 죄가 아니고, 나이 많음이 벼슬도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직 통하는 듯하다. 성인의 권리와 대접만큼 무거운 책임도 뒤따른다면 모르겠지만, (밥값을 대신 내주는 정도가 아니라면)그런 책임은 안중에 없는 건 물론이다.
어른이란 누구인가. 성인은 어른인가. 노인은 어른인가. 성인이나 노인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해당이 되지만, 어른이 되기는 쉽지 않다. 노인은 많지만, 어른은 드물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같은 뻔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저 문장에 내재된 정치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된다면 어떤 어른이 되고 싶나. 이어령, 홍세화, 채현국 같은 이를 어른이라 생각하는 나는 살면서 아는 것이 없음을 아는, 부끄러움을 아는 노인으로 늙어가기를 어렴풋이 바랄 뿐이다.
어릴 적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애새끼(아이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였다. 하사관 출신의 엄격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어른의 대화에 끼거나 말대꾸하는 걸 싫어했다. 당신이 보기에 성인에게나 허용된 행동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고,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던 아들은 함부로 제 의견을 내는 일 없이 소극적이며 수동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아이처럼 구는 걸 용납하지 않았으면서 성인으로 인정하지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해 주지도 않았다. 두 아들은 부모가 ‘소유한’ 세상 물정 모르는 보호 대상이었다. 그 꽉 막힌 불인정 아래 짓눌려 움직일 수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나는 숨이 막혔다. 키는 자라도 마음은 쪼그라든 상태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부자유친은 멀었지만, 장유유서는 언제나 가까웠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 존재하는 순서’는 어린 아들의 생활 전반에 적용되었다. 강압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의 아이다움에 대한 기준은 대체로 유교적 통념에 기초했다. 나는 나이로 인한 차별을 당연시하며 자랐고, 존댓말과 반말의 언어체계는 나의 한 세상을 층층이 짙고 공고하게 나누었다. 조명 설치 일을 하던 당신을 따라 일을 돕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놀고 싶어 한다거나 일하기 싫어 공부 핑계를 대기는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학업 성적이 좋아야 했음은 물론이었다.
당연히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성인이 되기를 바랐다. 성인이 되어 경계와 제한 없이 행동하고, 말하고, 날아오를 수 있길 바랐다. 막연히 그들이 누리는 뭔지 모를 것들을 상상했다. 당시에는 부모를 통해서만 좁은 시선으로 봐 왔던 그 성인의 것들,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화투를 치는 판에 낄 수 있기를 바랐다. 성인이 되고 싶었기에 더더욱 아이에게 금지된 것들을 동경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이만 먹으면 되었는데 그게 도통 쉽지 않아 애가 탔다. 새해에 떡국 두세 그릇을 비워도 나이는 한 살만 먹었고, 달력은 느리게 넘어갔다. 중고등학교의 고작 세 숫자뿐인 학년은 영원히 넘기지 못할 것처럼 멀기만 했다.
나는 뭐든 성인에 가까워질 준비를 서둘렀다. 수염이 빨리 났으면 해서 수시로 턱에 난 솜털을 깎았다. 일단 성인만 되면 나머지는 절로 획득되는 줄 알았다. 스무 살이 되면 다들 자연스레 내면이 성숙해지고, 외적으로 거대한 권리가 생기는 줄로만 알았다. 13자리 숫자가 적힌 네모난 주민 등록증은 그걸 증명하는 자랑스러운 자격증 같았다. 어른만 할 수 있는 일과 갈 수 있는 곳의 프리패스 같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낚였다는 걸 알았다. 결국 ‘어른은 애였다’. 성인이 되어서만 누릴 수 있는 권력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성인이 된 내가 여전히 한심한 아이였고, 다른 성인들도 아이였고, 노인들도 아이였다. 아이와 별다른 것도 없었다. 어'른'과 어'린'은 모음 하나의 눕고 선 정도의 얄팍한 차이만큼이나 가깝더라. 성인이 된 들뜬 상태가 지나 얼마간 성심껏 성인의 차이를 찾아 헤맨 뒤 알게 된 배신감이란.
성인이 뭐라고, 그깟 나이가 뭐라고 나는 나서지 말라는 타이름과 ‘애새끼’라는 욕을 들어야 했나.
마냥 어른이 되고 싶었기에 가치 없다고 치부해 함부로 낭비했던 내 어린 시절이 아깝다. 가능하다면 보물 같은 어린 시절을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내게 다가가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이와 성인은 평등하며 성인만 할 수 있다는 구태에 의문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너는 열심히 뛰어놀고 경계 없이 경험하는 게 일이라고, 모든 경험이 소중하며 지레 성인만 할 수 있는 것이라 물러서거나 사양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사양 따위는 성인이 되면 몸에 배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할 수 있다.
장유유서가 생활 전반을 지배하던 예전에 비하면 아이의 권리는 많이 나아졌지만, 한계와 차별은 여전하다. 오히려 노키즈존 같은 새로운 차별과 혐오가 스멀스멀 샘솟으며 퇴보하기도 한다. 늦게나마 선거권을 만 18세로 한 살 낮췄지만, 여전히 교내 정치 교육과 활동은 철저히 금지되고 있다. 나이 차별이 극심한 한국 사회는 언제까지 아이를 미성숙한 열등자로 범주화하고 권리를 제한할 수 있을까. 가르치되 존중하고, 보호하되 차별하지 않고 제한하지 않는 어른 되기는 언제가 되어야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