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만나면 얼른 이 책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 책에 대해 말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너무너무 좋은 책을 만나면 오히려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워진다. 혹시라도 내 말에 작은 오해나 편견이 생겨 이 책을 속단하고 읽지 않게 될까 봐.
지난 60일 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다는 염려 가득하고 친절한 자동 메세지 덕분에 생각보다 긴 시간 이곳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글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부터 써야 할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밝은 밤' 이 책에 대해 써야 했다.
최은영 작가의 첫 번째 책 [쇼코의 미소]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시기에 읽었던 어떤 단편소설보다 강렬하게 좋았다. 특별한 소재나, 자극적인 이야기 전개였다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특별하고 눈에 띄는 문체, 작가만의 고유 스타일이 드러나는 대신 유려하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 한동안 나는 이 소설집을 사람만 만나면 추천하고 다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는 이야기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최은영 작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 나왔다. 짧은 소설이 아닌 300쪽이 넘는 긴 호흡으로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나'는 남편과 이혼하고 희령으로 직장을 옮겨 이사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이혼을 인정하기 힘든 엄마와 나는 계속해서 부딪친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왔었던 희령이라는 도시는 엄마와 할머니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다시는 방문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예정된 만남처럼 나는 할머니와 조우한다. 그리고 할머니로부터 그녀의 증조할머니(삼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소설에는 증조할머니(이정선/삼천)-할머니(박영옥)-엄마(길미선)-나(이지연)까지, 4대에 이르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증조할머니의 친구 새비아주머니, 그녀의 딸 희자까지가 이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소설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여자다. 누군가에게는 딸이면서 누군가에게는 어머니인 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에 담겨있다.
얼마 전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진짜 000 할머니를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어."
000 할머니는 외할머니를 지칭하는 말로 엄마의 엄마다. 엄마는 엄마를 엄마라고도 부르지 않고 있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반복되어 온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가 최근에 또 한 건 생겼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노골적으로 외할머니를 좋아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좀 놀랐다. 할머니는 이제 80대의 노인이고 엄마도 환갑이 지났다. 환갑을 지난 엄마도 80대의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30대인 나도 역시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엄마를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엄마를 좋아해 보려고, 엄마를 좋아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엄마'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니라 '과장'님이라면, 엄마가 아니라 '고모'였다면 (피붙이라고 해도) 좋아하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엄마'는 다르다. 엄마를 좋아할 수 없다는 건 문제가 된다. 깊은 죄책감과 외로움, 원망 같은 것들이 늘 따라온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데, 엄마도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는 너무 절망적 이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밝은 밤' 속의 증조할머니는 아픈 엄마를 버리고 살기 위해 도망쳤다. 증조할머니 또한 사는 일이 팍팍하여 할머니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했다. 엄마와 할머니 또한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고 있다. 나와 엄마도 끊임없이 충돌한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어떤 말을 하면 상대방이 가장 큰 상처를 입을지 잘 알고 있는 존재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이 고스란히 적혀 있기도 했고, 내가 엄마에게 품었던 마음의 정체가 그대로 적혀 있기도 했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47p)
단순히 이 소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무릎이 푹푹 꺾일 만큼 힘든 시기마다 이들의 손을 잡아 준 여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와 딸만이 서로를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일으켜 줄 수 있는 건 오랜 시간 동안 만난 적 없던 할머니이기도 하고, 이웃집 여자이기도 하다. 남편이나 아버지가 줄 수 없는 것들을 강하고 따뜻한 이 여자들은 상대방에게 그 온기를 나눠주었다.
소설은 엄마와 딸의 상처를 성급하게 봉합하고 화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할머니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 내가 갑자기 엄마와 사이가 좋아져 눈물의 화해를 하고 다음날부터 하하호호 팔짱을 끼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좋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섣부른 화해보다는 각자의 성장을 담았다. 아주 작은 변화들,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작은 시도 같은 것들.
어릴 때부터 많은 소설을 읽어왔지만 엄마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소설은 처음이었다. 엄마 또한 이 소설을 읽고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이 속에 분명히 엄마의 모습도 있으니까. 하지만 과연 나는 이 책을 엄마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이런 두꺼운 책은 못 읽는다고, 이런 책은 안 읽는다고 이야기하는 엄마를 견딜 수 있을까? 역시 쉽지 않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 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넣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14p)
이 소설은 쉽게 상처 받고, 사랑받고 싶은 내 마음이 욕심일까? 싶어 스스로를 다그치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건네는 풍성하고 따뜻한 위로를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