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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y Mar 10. 2022

공터에서_김훈

2022.03.10 / 2022 대선 패배 감정시점

누군가 말해줬음 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걸음걸이부터 숨쉬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하나하나 지시해줬음 했다. 생각이란 자체가 귀찮아졌으니 말이다.


천천히 깨어나는 의식 안으로 현실이 밀고 들어와  온전히 눈 뜨기를 주저했다. 습관처럼 인터넷 뉴스를 보려고 들어 올렸던 핸드폰을 급하게 내려놨고,  2027년이라는 숫자를 떠올리자 알아서 한숨이 흘렀나왔다. 길을 걷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 별 가치 있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비상식과 악행이 또 다른 비상식과 악행으로 덮이길 자주 반복되면 사소한 일이 돼버리는구나 싶었다


같은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도, 누군가는 급하게 걸어오고 누군가는 급히 걸어간다. 두 발로 걷는다는 건, 어쩌면 휘청이는 한 발을 다음 발걸음으로 교묘하게 숨기는 것일지 모른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냥 그러하다고 정신 승리해야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내가 나에게 질문하는 방식은 HOW. 당장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 대신 WHY.  왜 꼭 그가 당선됐어야 했는데? 그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나아갔으면 해서? 대리만족 같은 그런 거? 내가 그리는 세상으로 바뀌어 간다면 모두가 다 행복해지지나? 어쩌면 나는 지금 현재의 내 선택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내 의견이 인정받지 못한 것이어서 더 광적으로 흥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돌아갈 때 느껴지는 도박과도 같은 과잉 감정 상태. 그런 흔한 욕구의 좌절.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욕구는 좌절되면서 욕구로서 가치가 더해지니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의식적으로 흘려보내며 들여다보는 것. 그래서 나와 세상이 좀더 차분해지고, 안개가 걷히고 산맥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도 된다는 것. 그냥 내버려두고 살펴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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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 김훈' _ 불쌍한 오늘의 나에게 이

 책이 위로가 되길 바라며 쓴다.

오랫동안 그의 글을 읽어왔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내 젊은 날의 숲, 개, 밥벌이의 지겨움, 흑산, 강산무진, 현의 노래 등등등. 이제 그의 문장이 익숙하다. 부사와 형용사를 소거한 단문의 문장들. 주어와 동사를 한 번만 등장시키며 짧게 끊어간다. 사실만을 열거하겠다는 강박관념 같은 글쓰기. 한 문장에 주어 동사가 두 번 등장하며 글이 길어지는 경우는 세상의 모순을 드러낼 때다. 세상에 넘쳐나는 모순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같은 단어를 두 번 배치시키는 것이다. 상반된 의미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병렬로 배치돼 두 번씩 등장하는 하나의 단어. 한동안 나는 그의 책이 아닌, 그의 이런 문장을 자주 떠올렸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모순된 세상은 한 문장으로 충분한 듯싶었다. 이 책에서도 하나의 문체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듯 그의 글쓰기는 여전했다.


‘공터에서’


읽기를 마치며 먼저 책 제목을 떠올렸다. 그리고 글쓰기를 마치고 제목을 정하려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책 제목. 본문에서 책 제목과 같은 단어는 한 번 등장한다. ‘공터에 억새가 피었다’와 같은 문장에서다. ‘공터’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때 나는 제목을 확인하기 위해 책 표지를 다시 확인했었다. 그리고 제목 선정의 이유가 스스로 납득되기를 기대하며 잠시 책 읽기를 멈췄었다.

‘공터’라는 말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답을 찾지 못하며 흩어지는 생각 안으로 계통이 명확하지 않은 질문들이 섞여 들어왔다.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자꾸만 생각 어스름 안에서 간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이 책과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실제 존재한다, 실존하는 이야기라는 말로 주로 사용되는 그 단어는 왜 자꾸 떠오르는가?


합리주의. 세상은 논리적이고 보편타당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반면, 실존주의, 그러니까 실제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일 수 없으며 단지 우연이 겹쳐 세상은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까뮈가 그렇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한 세상은 실존주의의 개념 아래에서, 이 책 ‘공터에서’ 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화자인 나, 그의 아버지 마동수, 화자의 형인 장남 마장세의 회색빛으로 닮은 인생 이야기. 닮음은 혈연관계의 끊을 수 없는 운명을 말한다. 형제는 이를 외면하고 싶지만 운명은 사진 위로 드러나는 3 부자의 모습처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운명에도 모순은 내재해 있을 것이다. 작가는 한 인간이 세상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한 톨의 씨앗이 공터에 싹을 틔우 듯 바람처럼 가벼운 운명의 본질일 수 있음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김훈은 까뮈를 닮아 있는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닮았지만, 아니다’이다. 누군가는 까뮈와 같이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스스로의 해법을 제시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지 못하고, 세상은 우연에 의해 돌아간다며 세상을 단순히 정의하는 수준에 작가가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닮아 있다는 말, 같은 개념에 묶인다는 말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또다시 하나마나한 질문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개념으로서 개념은 어떻게 정의돼야 하는 가이다.


말의 역사성. 개념으로서 단어가 갖는 역사성을 먼저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뜻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정확히는 이해가 아니라 역사책을 살펴보듯이 실존주의란 말이 처음으로 태동했을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말 그러니까 개념의 한계성. 말이 함축하고 있는 개념의 태생적인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비경상적 지출’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경상적 지출’을 정의해야 하고, ‘경상적 지출’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자본적 지출’이라는 개념을 꺼내 들어야만 하는 뫼비우스 식의 해석의 한계 말이다.


스스로 설 수 없는 비스듬한 존재로서의 말. 그래서 큰 개념(말 자체)을 하위 개념(합리주의, 실존주의)으로 구분하고, 그 구분된 개념에 기초한 해법 제시는 개념이 구분되기 이전 큰 개념의 상황을 원천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모순과도 같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또 다른 모순을 부정하는 방식으로서 모순에 대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작가는 자신만의 결론 그 한 줄을 위해 소설 한 권을 할애하여 수도 없이 많은 모순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저자가 그동안 써 내려간 그의 모든 글에서 세상은 무내용했고, 이해되지 않으며, 자주 난감했다. 그에게 모순은 사건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일상 그 자체를 말했다. 책 한 권에 담긴 이야기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나는 이를 모순의 기록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가 아닌 모순 그 자체의 세상을 사실로써 기록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모순된 세상을 신고하려는 게 아니라, 세상 그 자체가 모순이며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운명조차도 모순과 함께 피어난다는, 너무 건조해서 말을 걸 수조차 없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글을 또 세상에 내어 놨구나 싶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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