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될지 모르겠는 출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열리는 AWE EU에 방문하기 위해 휴가를 냈다. 휴가를 낸 그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비행기 티켓을 끊은 당일 용산구청에서 긴급 여권을 발권받았다.
그다음 날 인청공항에서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비엔나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지금은 경유지인 이스탄불 공항이다. 이제 남은 연차는 없고 카드 한도가 얼마 안 남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보통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신청하기 위해 가입을 하다 보면 당신은 어디에 속합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럴 때마다 꼭 복수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나도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확실한 것은 나는 제품 디자인, 3D 디자인, 3D 모델링, 3D 애니메이션, 3D 그래픽스(WebGL 프로그래밍)를 취미 처럼 하다가 그 복합 산물이 될 수 있는 WebXR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AWE 행사에서 당신은 어디에 속합니까 라는 질문에 XR Enthusiast라고 단일 선택할 수 있었다. 어떤 열정 넘치는 ORI INBAR라는 사람이 세계 각지를 돌며 XR 관련 종사자들을 모아 행사를 해오던 것이 이제는 XR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벤트가 되었다. 1년에 미국, 아시아, 유럽에서 순회하며 몇 차례 진행되는데 2023 마지막 AWE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10월 24일, 25일 양일간 열린다.
나는 현재 WebAR 저작도구 플랫폼의 프로덕트 팀에서 Service Owner를 맡고 있다. SO라고 부르는데 그냥 총알받이이자 허드레일꾼이며 권한은 없는데 책임 소지는 있다.
내가 그러면서 일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 관심 있는 분야여서 이다. 그런데 그 관심과 열정을 유지하려면 주변에도 그런 열정적인 사람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열정 없는 사무실을 나와 AWE 같은 행사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척박한 XR 비즈니스를 일궈가는 사람들의 열정을 피부로 느끼면 새로운 아이디어와 영감과 에너지가 생긴다.
AWE 행사 참여비는 상당히 비싸고 해외에서 열리기 때문에 개인이 가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우리 팀은 1년에 2번은 행사에 스폰서와 Exhibitor로 참여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서울에서 현지로 파견할 사람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번에 내가 가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이번에 행사가 열리는 비엔나에도 우리 회사 지부가 있는지라 비엔나에서만 참여하고 서울에서는 사람을 파견가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아마 비행기
값 등 경비 때문이리라. 이전부터 분위기는 갈 것처럼 조성이 되었다가 갑자기 통보를 받게 되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AWE를 위해 서울에서 서포트하면서 그리고 그동안 일을 하면서 비엔나 팀과 소통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러지를 못했어서 답답함도 있었다. 가서 보고 싶기도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2021년과 2022년의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늘 현장과 가까이에 있었다. 2021년에는 WebAR 프로젝트를 개별 클라이언트를 위해 제작 납품하면서 국내에서 WebAR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어떤 수요가 있는지 피부로 느끼며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21년에서 2022년엔 그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WebAR 저작도구를 만들어 론칭하고 국내 메타버스 엑스포에서 론칭 발표를 하며 여러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았다.
그런데 2023년엔 회사 안에서만 갇혀있었다. 고객을 만나지도 못했고 동종 업계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매일 구글에 의존하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었다.
AWE 파견이 업계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현장에서 영감을 얻고 싶은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듣게 되니 뭔가 꿈틀 했다.
AWE가 시작하기 약 4~5일 전, 사실상 내가 맡은 일이 버그 리포트 외에는 거의 없는 순간이 되었다 판단했다. 다음 주면 AWE가 시작한다 생각하니 뭔가 조급해졌다. 올해 마지막을 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 굉장히 아쉬울 것 같았고 어쩌면 내가 국내 XR업계에서 성과 없이 버티는 것과 다른 부서가 벌어오는 돈을 우리 부서가 미래를 위해 투자한답시고 탕진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듯 해 위기감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쉴 생각을 안 했어서 사용하지 않아 쌓여버린 연차를 다 소진하기로 했다. 어차피 연차 환급도 안 해준다 해서 다 써야 했다. 목요일, 연차를 내고 비행기 표를 끊었다. 비행기 표를 끊으니 여권이 어딨는지 생각이 안 나 그냥 긴급발권받았다. 그리고 금요일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현재 토요일, 터키 이스탄불 공항이다. 이제 30분 뒤에 비엔나행으로 환승한다.
자비로 행사를 참여하려고 하는 게 눈물겹기는 한데 일단 모르겠다. 계획도 없고 가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가봐야, 그래야 내년의 내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만에 출국 결정과 준비를 하면서 거의 4달치 생활비는 다 탕진한 것 같다. 모르겠다. 비엔나에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