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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징 Aug 05. 2020

견딜 수가 없어서 어디로든 떠나야겠어요

赤沢壮、七面山 - 山梨県早川町

  올해로 일본에서의 '社会人(사회인)'생활이 3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의 삶을 괴로워했던 과거는 그저 타고난 대로의 나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고작 3년..이라는 생각도 잠깐 머릿속을 스치지지만, 어떻게든 숨 쉴 틈을 만들지 않으면 이 생활을 오래 버텨낼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코로나 19가 발생하고 일본 정부의 차분하고 꼼꼼한 (할많하않) 대응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견딜 수가 없어서 어디로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인고의 시간을 공유하는 마당에 이곳저곳으로 바이러스를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는 없기에 이왕 이렇게 된 것, 일본 국내의 이런저런 산을 기웃거려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속으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수많은 초보가 그러하듯 값비싼 장비를 구입하러 신주쿠로 향합니다. 과연, 비도 오고 외출 자제 분위기이다 보니 손님이 아무도 없네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즐거워진 기분으로 점원과 짧은 잡담을 나누고 돈 쓴 자를 극진히 대하는 현관 배웅 서비스를 받으며 가게를 나섭니다. 새로 산 장비를 걸쳐 메고 설레는 마음으로 목적지로 향합니다.


목적지는 야마나시현 미나미 코마군 하야카와 쵸 아카사와(山梨県南巨摩郡早川町赤沢)입니다.

https://goo.gl/maps/NyYit6Gc7ZQV3bL18


아카사와소는 가마쿠라 중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에 의해 시창된 일본 불교 종파의 하나인 일연종(日蓮宗)의 일연종 미노베 본산(日蓮宗見延本山)과 시치멘산(七面山)을 잇는 참배길(裏参道・見延往還)을 찾는 참배객들의 숙소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숙소 마을로서 가장 번영한 것은 에도시대로 이번에 예약한 오사카야(大阪屋)는 당시에 지어진 목조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입니다.

숙소 공홈 <https://akasawasyuku.com>


  이곳을 목적지로 정한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전 매우 게으르기 때문에 사전 조사라는 것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irbnb를 검색하다 흥미로워 보이는 숙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묵어보고 싶어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원했던 대로 이곳은 꽤나 첩첩산중 시골마을이기 때문에 도착에 소요되는 시간이 매우 깁니다. 물론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저는 이동시간을 즐기는 타입이기 때문에 가장 느긋하고 가장 저렴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新宿 ー(JR中央線中央特快)→  高尾 ー(JR中央本線)→  甲府 ー(JR見延線)→  下部温泉 ー
ー(京成バス)→  七面山入り口(奈良田行き)

  신주쿠(新宿)에서 JR중앙선(中央線)을 타고 출발해서 타카오(高尾)에서 JR중앙본선(中央本線)으로 환승합니다. 코후(甲府)에 도착하면 JR미노베 선(見延線)으로 환승해서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여행을 즐기기 시작한 지 4시간 30분 정도가 될 때쯤 시모베 온센(下部温泉) 역에 도착합니다. (JR중앙선은 항상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노선이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시모베 온센 역 1

  시모베 온센 역에 내리면 상쾌한 녹음이 시야 한 가득 들어옵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연을 즐기면서 버스 시간표를 확인합니다. 버스는 대략 2~3시간 간격으로 배차되어있고 하루에 5번 정차합니다. 노선이 2개이기 때문에 나라타행(奈良田行き)버스인지 확인하고 승차합니다. (버스 운전수 아저씨께 어리바리 물어보면 냅다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즐거운 여행에 한점 옥에 티를 남길 수 있습니다.) 엄청난 유속의 이름 값하는 하야카와(早川)를 따라 30분쯤 달리다 시치멘산 입구(七面山入り口) 역에 내립니다. 여기서부터 30분간 가볍게 등산을 하면 아카사와 소(赤沢壮) 마을이 나타납니다.

아카사와 소 어귀에서 스미세 방향으로 내려다본 풍경


  이번 여행의 목표는 단 하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 때리고 있기"입니다.

라는 핑계를 대고 여행 출발 아침부터 늦장을 부리다 타야 하는 차는 족족 놓쳐가며 중간중간 있는 샛길 없는 샛길 죄다 들르다 보니 시모베 온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3시가 지났습니다. 숙소에는 오후 5시는 넘어야 도착한다고 이미 연락해 두었고, 버스로 30분가량이라고 했으니 어쩐지 걸어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도를 확인하자마자 핸드폰의 전원은 꺼졌지만 그 옛날 시험 전날의 나를 떠올리며 그때와 같이 뇌 어딘가에 저장되어있을 지도를 떠올려줄 잠재의식을 믿으며 출발합니다.

  조금 걸어 내려가다 보니 터널이 나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며 더 나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중에 발치에 (로드킬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은 개의 미라가 보입니다. 개의 명복을 빌면서 역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버스를 기다립니다.

시모베 온센 역 2

  이번 여행 일정은 7/24~7/26 3일간이었는데 장마의 피크 기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산중은 날씨 변화가 더 격렬(?)해서 시치멘산 입구역에 도착하니 하늘이 심상치 않습니다. 역 근처는 몇몇의 민가가 모여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뭍과 산속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이 마을은 마을 주민들에게는 예부터 스미세(角瀬)라고 불리고 있지만 지도에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아카사와 소로 올라가는 산길의 입구를 어리바리 찾고 있으니 마을 주민분이 말을 걸어옵니다. 원래 목적은 까맣게 잊고 신나게 잡담을 나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お気をつけて)가 순간 공포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렸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아카사와 소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마을까지 올라가는 길은 예상보다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서 초반엔 잠깐 불안한 기분이 들지만, 조금 오르다 보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됩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땀도 비 오듯이 쏟아지지만 덕분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작은 폭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쾌한 음이온(?)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집니다. 30분 정도 쉬지 않고 산길을 오르다 보면 안개 사이로 마을 어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날씨 때문인지 시간대 때문인지 첫인상은 인기척 하나 없는 유령마을같이 느껴지지만 군데군데 켜진 불빛을 보고 안도합니다.

숙소 1층의 휴게실도 각 팀별로 구분된 공간을 배정받습니다

  숙소의 주인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방을 배정받고 주변을 둘러보니 오늘 숙박객은 나를 제외한 두 커플. 비에 젖어서 엉망이 된 모습으로 어두컴컴한 산길에서 나타난 아낙(?)을 보고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진 않지만 3초 정도 생각은 해 보았습니다.

  식사는 스스로 만들어서 먹습니다. 채소를 무료로 제공하고 쌀은 한 홉에 300엔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변에 편의점 같은 가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산속에서 딱히 할 일도 없고 정성스레 식사를 준비해 먹는 것도 기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오이를 깨끗이 씻어서 썰고 간장을 조금 뿌려 저녁을 해결합니다.


침실로 향하는 2층 복도

  과거에 참배객들의 숙소였던 이곳은 건물 내부의 공간이 아주 넓습니다. 하지만 장미기간이라 손님 수는 적고 그마저도 내일이면 모두 체크아웃한다고 하니 내일은 주인아주머니와 둘이서 온전히 이 넓은 공간을 누린다고 생각하니 철딱서니 없지만 정말 시골 할머니 댁에 온 것 같은 기분에 마냥 즐겁습니다. 산속에서는 숙소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 이를 사용하지 않으면 외부와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라우터에서 조금 멀어지면 신호가 잡히지 않기 때문에 다들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1층 휴게실

  에어컨 같은 문명의 이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그러나 냉장고는 있습니다.) 침실에 돌아가서 준비된 이불을 덮고 누우니 산속의 습기를 제 혼자 다 빨아들인 듯 물침대 수준입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입니다. 창 밖에는 추적추적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산속의 밤이 마음을 아주 차분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틀째는 참배길을 걷습니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어서 정상까지는 갈 수 없었지만 단풍이 물들 시기에 다시 와 보고 싶어 졌습니다. 사실 차가 없는 여행객이 아카사와 소에서 할 수 있는 있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참배길을 걷거나 스미세에 들르거나 하는 정도입니다.

시치멘산경진원(七面山敬慎院)가는 길
시치멘산 입구 삼나무길
참배길 안내판


  한 바퀴 산책을 하고 나니 벌써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오늘에야말로 정말로 정성스러운 식사를 차려 끼니를 해결합니다. 숙박객이 달랑 한 명이다 보니 아주머니께서 새로운 채소 공급을 잊으셨나 봅니다. 오늘은 감자 파티입니다.

아침식사 : 감자조림, 감자볶음
저녁식사 : 감자조림 2, 오이 샐러드 2, 된장국

  남은 저녁 시간은 다다미를 굴러다니면서 온갖 벌레를 뭉개가며 명상 아닌 명상을 합니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더니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습니다. 창밖에서 불길한 찍찍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신경이 쓰여서 다시 잠에 들기가 힘듭니다. 비는 폭우 수준으로 쏟아지고 있고 덕분에 바람은 한점도 불지 않습니다. 너무 더운 나머지 방심하고 창문을 열자마자 박쥐가 들이닥칩니다. 좀 전의 그 소리는 박쥐 소리였나 봅니다. 동이 터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확인해보니 그사이에 제 집으로 돌아갔나 봅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밤새 뒤척이느라 피곤했던 몸을 뉘이고 산속 공기를 마시며 마지막 아침을 느긋하게 즐겨봅니다.

박쥐에게 습격당한 다음날 아침

  집으로 돌아갈 준비하고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스미세로 천천히 내려가다 보니 서서히 비구름이 걷히고 아카사와의 맑은 하늘이 나타납니다. 맑은 가을날 꼭 다시 와보고 싶은 곳입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특별히 한 것은 없지만 나쁘지 않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카사와소에서 스미세로 가는 길
스미세 어귀의 어느 다리


  시모베 온센 역에 도착하니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합니다. 다시 복작복작한 도쿄 한복판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대변해 주는 건가 싶다가도 우울한 기분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그저 낭만으로 즐겨봅니다.

  도쿄에 돌아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서 도쿄 백개의 명산(東京百名山)에 관한 책을 빌렸습니다. 요즘 일하는 것은 뭘까라는 생각에 자주 빠지게 되는데 그만큼 사생활을 충실히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사회적 입지를 다진 것도 아니지만, 역시나 인간은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행복해지지 못하는 복잡한 동물인가 봅니다.


몰려오는 비구름을 피해서 맑은 하늘 아래 시모베 온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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