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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Jan 02. 2024

한국어 제목 빼고 다 좋은 책

랜돌프.M.네스 <이기적 감정>

…인간의 정신은 기능에 따라 경험을 분류한다. 의자는 앉기 위한 것이고, 망치는 뭔가를 두드리기 위한 것이고, 눈은 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조현병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신경성 식욕부진증은 어떤 점에서 유용한가를 묻게 된다. 하지만 정신장애에는 기능이 없다. 질병을 적응으로 바라보는 관점인 VDAA는 진화정신의학의 가장 큰 오류다. 인간의 모든 특성이 적응이라는 착각은 인간 정신의 속성상 자연스러운 실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엉터리 학설은 플라밍고가 분홍색인 이유는 석양을 배경으로 몸을 위장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생리학자들과 행동생태학자들은 그보다는 신중하지만, 그들도 날마다 적응에 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인 만큼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부분의 특성들은 어떤 혜택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고 불가피한 상충관계가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남은 과제가 많다고 해서 정상적인 행동에 관한 지식을 활용해 비정상적인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출 이유는 없다. 섭식장애는 자연선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지만 기근이 발생할 때 식이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은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ADHD는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니지만 주의력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은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중증 우울증은 자연선택의 산물이 아니지만 정상적인 기분저하와 기분고양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의학의 다른 분야에서는 정상적인 기능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병리현상을 이해한다. 그렇게 하면 증상과 질병을 구별할 수 있으며 원인이 여러 가지인 심장발작과 같은 증후군을 인식할 수 있다. 생리학과 생물화학이 의학의 모든 분야에 토대를 제공하는 것처럼, 진화론의 틀은 정신의학에 토대를 제공한다.

-랜돌프.M.네스, <이기적 감정>, 안진이 역, 더 퀘스트, 484~6

교육방송의 대단한 프로젝트 ‘위대한 수업’의 이번 시즌은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롭다. 이전 시즌과 같이 고전적인 학문의 분야에서 인정받은 석학들도 출연하고 있지만,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하는 선구자적 학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랜돌프 네스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정신과 임상의로 활동하면서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끌어들여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또한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독특한 사람이다. 나는 꽤 오래전에 그의 책을 이미 한 권 읽은 바 있다. 네스 씨가 진화론의 대가 조지 윌리엄스와 공저한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를 재미있게, 상당히 인상적으로 읽었던 것이다. 위대한 수업 강의를 들으면서도 저 네스 씨가 그 네스 씨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네스 씨 본인이 책에 대한 언급을 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그 책은 헌책방에 팔아치우지 않고 책꽂이에 꽂혀있다. 한 번 더 읽겠다고 생각하고는 책장에 묻어두었던 무수한 책들 중 한 권이다.

네스 씨의 강연은 그의 탁월한 말솜씨 때문에 더욱 재미있다. 위대한 수업은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시 볼 수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그의 강연만 찾아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유머는 물 흐르듯 이야기와 섞여서 듣는 사람을 계속 미소 짓게 만든다. 강의나 강연이라기보다는 인간대 인간으로 만나 자신의 속내와 고민을 털어놓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책 <이기적 감정>도 그의 강연이 준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자로서, 정신과 임상의로서 객관적으로 학술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글쓰기를 하는 석학들이 적지만도 않지만, 그의 솔직함과 따뜻함이 좋게 느껴졌다.

정신과 의사가 기존의 정신병 치료방법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이후로 진화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세미나, 컨퍼런스 등을 쫓아다니며 열성적으로 질문을 하고 길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읽다 보면 새삼 존경심이 들기도 한다. 이미 안정적인 직장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은 전문가가 자신이 잘 모르는 학문 분야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렇지만, 정신병과 그 치료법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져 길을 찾아내는 것도 대단하다. 구하는 자에게 길이 열리는구나 싶기도 하다. 책에서도 말하듯 중증 우울증 환자가 약을 먹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약만으로는 부족한 이들에게 어떤 조언과 어떤 행동적 처방이 필요한지에 대해 진화정신의학은 기존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고 기대된다. 예를 들어,

… 나는 진화와 행동에 관해 알고 나서 치료법을 많이 바꿨다. 다른 의사들도 공황발작은 투쟁-도피 시스템의 거짓 경보이며 그런 거짓 경보가 많은 이유는 화재감지기 원리로 설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황장애 치료법은 개선될 것이다. (중략) … 내가 가르친 정신과 레지던트들이 나에게 말한 바로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당신이 하려는 아주 중요한 일들 중에 실패를 거듭하는데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나요?”

-위의 책, 491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 책을 읽은 것은 상당히 유용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나 자신의 틀을 깨는 것에 조금은 골몰했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으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 여파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우울해지는 것은 마리를 떠나보냈을 때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린 듯한 절망과 우울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두려워 그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망 다니던 나 자신의 뒤통수를 잡고 180도 틀어 얼굴을 마주 본 한 해였던 것이다. 그 모습은 아주 실망스럽지만은 않았지만 썩 자랑스럽지도 않았고, 절망을 말하기도, 그렇다고 희망을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나는 결국 이대로 살다가 죽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하루종일 엄습해 올 때면 숨이 막히다가도 또 어떤 때에는 한없이 낙천적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이 책을 읽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한 해를 돌아보게 되었고, 아직은 좀 더 노력해 봐도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포기해야 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우울의 심연에 굴러 떨어지지 않을지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직 그 방법은 모른다. 모르는 상태로 세상을 떠날 확률이 높다. 어찌 됐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순간순간 엄습해 오는 허무의 심연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나는 우울한가? 그렇다. 나는 우울증인가? 인간은 모두 우울한 면을 갖고 있다. 나는 병적인 우울증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인지 인용문의 저 질문은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당신이 하려는 아주 중요한 일들 중에 실패를 거듭하는데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나요?’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모르는 게 병이라면 병일 수도.

(책의 원제는 ‘나쁜 감정에는 좋은 이유가 있다 Good reason for bad feelings’ 이다. 이를 부제로 ‘나쁜 감정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라고 작게 써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제목은 <이기적 감정>이 되었다. ‘이기적 유전자’가 유래 없이 히트 친 나라여서 그런지 아무 데나 ‘이기적 뭐뭐’라고 붙이는 작법이 난 정말 싫다. 책의 저자도 별로 좋아했을 것 같지 않은 제목이다. 한국에서 히트 친 번역서들의 제목(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나 <총, 균, 쇠> 같은)은 상당한 아류의 제목들을 양산해 내는데, 그중에는 정말 좋은 책들도 많다. 그런 경우 이 책처럼 노림수가 낭낭하고 성의 없게 느껴지는 제목이 가장 아쉬운 요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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