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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Jan 09. 2024

우울한 현실주의자의 낙관적 희망은 가능할까

<이기적 감정>


… 인생의 큰일들에서는 대체로 끈기와 낙관주의가 그만한 보답을 받는다. 새로운 직장이나 동업자를 찾으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은 문제가 좀 있더라도 다른 길을 거들떠보지 않고, 언젠가 일이 더 잘 풀리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낙관주의자들은 보통 그렇게 한다.

하지만 어떤 시점에 이르면 계속 노력하는 것이 실수가 된다. 만약 끈질기게 노력해도 성공할 것 같지 않다면 냉정한 눈으로 객관적인 분석을 해봐야 한다. 기분저하가 사람들을 더 현실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우울한 현실주의’는 10여 건의 연구로 입증된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당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관적이다. 임의의 시각에 불이 들어오는 전등을 주고 조절 단추를 눌러달라고 부탁하면 대부분의 피험자들은 자신이 단추를 눌러서 빛이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피험자들은 자신들이 전등에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 우울한 현실주의는 여러 나라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슬픈 이야기나 슬픈 영화를 사용해 기분저하를 유도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미래에 관해 훨씬 정확하게 분석한다. 비록 그 효과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는 않지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인생의 주된 목표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저하는 낙관적인 환상을 떨쳐버리고 객관적인 자세로 대안을 고려하도록 유도한다. 그런 전환 과정은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랜돌프.M.네스, <이기적 감정>, 안진이 역, 더 퀘스트, 218~9

나는 가끔 나 자신이 병적이지 않은 만성적 우울의 상태라는 생각을 하고는 하는데, 책의 이 구절을 읽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우울한 현실주의’는 내가 아주 오래 지속해 온 삶의 태도다. 이런 태도를 지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어리석게도 지인들에게 현실적인 (주로 냉정하게 비관적인) 조언들을 무심하게 했다가 마음 상한 몇몇으로부터 원망 섞인 공격을 받은 적도 있다. 몇 번의 실수와 착오 끝에 우울한 현실주의적 태도는 나 자신만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실은 비관하더라도 타인에게 말할 때에는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주로 해준다. 책에서 말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당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관적’이기 때문에 현실주의적인 조언은 지나치게 냉정하고 공격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읽고 깨달은 것은 그뿐이 아니다. 우울한 현실주의적 태도가 나의 주된 방어기제였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책에서 말하듯 ‘계속 노력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항상 한 발 빠르게 포기했다.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바로 포기한다는 식의 태도는 어쩌면 많은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해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뭐 하나 이룬 것 없게끔 만들기도 했다. 무언가에 마음껏 몰입하는 것도 꺼려했다. 항상 제3의 눈으로 나 자신을 보려고 애써왔고,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여러 모로 병적인 우울증의 요건을 다 갖춘 셈인데 병증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은 우울의 감정에 몰입되는 것조차 꺼려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도 저도 그도 아닌 인간이 되어 이도 저도 그도 아닌 삶을 살아온 셈이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이제 와서 삶의 태도를 180도 바꿔 낙관적인 인간으로 살아볼 생각은 없지만 이 지나친 방어 뒤에서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기에도 좀 지쳤고 지겹기도 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 나는 객관성의 적합도를 극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인간 집단 안에서의 삶의 집단 구성원들에게 열정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객관적 성향을 지닌 개인들은 낮은 평가를 받고 거절당한다. 스포츠 팬클럽에서는 홈팀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말을 꺼내는 경솔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것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경과학, 정신분석학, 행동치료, 가족관계 치료 그리고, 그렇다, 진화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집단들도 핵심 도식에만 충실할 것을 고집하곤 한다. 그 핵심 도식에 맞지 않는 발상과 사실들은 무시되고, 반박당하고, 심지어는 억압을 당한다. 다른 견해에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접근하거나 동정적인 사람들은 배제된다. 그런 경향은 우리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고 아마도 유전자에게 유용하겠지만, 여러 분야를 연결해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책, 372~3

종족적으로 즉 자신이 속한 종족에 편향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추세를 염려하는 것은 비단 네스 씨만이 아니다. 미국의 사회학자들 대부분은 미국 사회의 극단적 편향, 진영논리를 염려한다. 극단적인 진영논리는 대한민국에서도 큰 문젯거리다. 나는 이제 내가 감히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도 꺼내기 꺼려진다. 어느 진영에 속하자마자 강요되는 것들의 대부분이 매우 부당하고 지나치며 거부감이 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박쥐가 되기로 했다.  다수가 박쥐인 사회라면 박쥐가 아닌 극단의 존재들이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일 것이다. 결국 인간 사회의 대부분이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물론 아무리 상대적 가치가 중요하다 해도 기본적인 상식을 저버리면 안 되고, 그 상식이 구성원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정의, 원칙과 같은 것에 근거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상대성을 인정하는 구성원의 목소리는 늘 상대적으로 작다 보니 잘 들리지 않는다. 양 극단에서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지르는 목소리에 묻히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질려서 그에 대응하고 싶지 않아 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이 정상국가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려면 일단 그 극단이 소수이고 합의가 가능한 중간지대가 두텁다는 것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생존에 적합한 유전자는 항상 양극단이 아닌 ‘중간’에 두텁게 위치한 형질을 지녀왔다. 또한 이상적인 경제상황은 중산층이 두텁게 유지되는 식으로 구현된다. 한국처럼 이데올로기가 왜곡된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잣대로 나누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이제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좀 더 세분화된 가치들, 평등과 자유가 공존하고 공공연한 성차별과 성적 소수자들의 차별로부터 자유로우며 페미니즘이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낙인이 되지 않는 사회는 과연 가능할까? (방금 스스로 진보진영에서 이탈하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가치는 모두 진보적인 것들이지만 한국의 이른바 진보세력이 이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믿음이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다.) 나는 여전히 현실적으로 비관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안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모이면 그것이 다시 주류의 목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 낙관적으로다가 희망을 가져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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