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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Jan 22. 2024

재귀와 삶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

… 재귀란 무엇인가? 대화 “작은 화성의 미로”에서 보여준 것이다 : 중첩과 그 변이체. 그 개념은 아주 일반적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 속의 영화, 그림 속의 그림, 러시아 인형 속의 러시아 인형, (심지어 괄호 쳐진 주석 속의 괄호 쳐진 주석!) - 이것들은 재귀가 가진 매력의 일부일 뿐이다.)

중략

때때로 재귀는 역설과 아주 비슷해 보인다. 예를 들면, 재귀적 정의들이 그렇다. 그런 정의들은 얼핏 보기에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순환적일 것이고, 비록 완전히 역설로는 아니지만, 무한후퇴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재귀적 정의는 (그것이 제대로 기술되는 경우에) 결코 무한후퇴나 역설로 가지 않는다. 이것은 재귀적 정의가 어떤 것을 결코 자기 자신을 가지고 정의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보다 단순한 버전을 가지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중략

더 복잡한 재귀의 보기는 당연히 앞의 대화이다. 거기서 아킬레스와 거북은 각기 다른 모든 층위들에서 출현했다. 때로는,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읽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다소 혼미스러워지는 경우이다. 그래서 상황을 분명히 파악하려면 주의 깊게 집중해야 한다. “자, 실제의 아킬레스와 거북은 여전히 굿포춘의 헬리콥터에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층위의 거북과 아킬레스는 에셔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 층위의 아킬레스와 거북은 ‘작은 화성의 미로’ 음반의 홈선 속을 돌아다닌다. 그러나 잠깐-내가 어디선가 한 층위를 빼먹었군……” 대화 속의 재귀를 추적하려면 우리는 머릿속에 이러한 의식적인 스택을 가져야 한다.

…중략

…우리가 음악을 재귀적으로 듣는다는 것, 특히 마음속으로 조에 대한 스택을 유지한다는 것, 새롭게 전조할 때마다 새로운 조를 그 스택에 푸시한다는 것이다. -중략- 원래의 “작은 화성의 미로”는 조성을 급격하게 바꾸어, 듣는 이로 하여금 미로 속을 헤매는 느낌을 주려고 시도한 바흐의 작품이다. 우리는 곧 혼란에 빠져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당신은 원래의 조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테세우스처럼 왔던 길을 되밟아 갈 수 있도록 해줄 실을 주는 아리아드네와 같은 여자 친구가 없으면, 알 수가 없다. 이 경우에 그 실이란 바로 악보이다.

- 더글라스 호프스테터, <괴델, 에셔, 바흐>, 170~174

이 책에 대해 이어오던 리뷰를 일단락하기 위해 이 광대한 책의 어느 부분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뒤적거렸다. 가장 핵심적이기도 하고 가장 근원적으로 나를 매료시켰던 이 책의 아이디어는 바로 ‘재귀’라는 개념이었지만 한두 단락 인용하는 것으로 감당이 안 되어 외면하고 있었다. 짧고 혼란스럽지만 위의 인용은 아킬레스와 거북의 우화를 통해 (그리고 바흐의 음악을 통해) 재귀의 개념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음악이 가지는 순환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화성의 변주를 통해 전개되어 분해되고 펼쳐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미로와도 같은 음악은, 처음의 출발점을 주의 깊게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떻게 그 지점에 도달했는지 놀라게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자기 복제 내의 자기 복제를 보여주는 식의 순환구조는 또한 에셔의 그림과 ‘재귀’의 의미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괴델의 정의에서도 드러난다. 한편 재귀적 구조를 가장 대중적으로 소화시킨 것은 영화 <인셉션>이라고 생각하는데,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 그리고 결국 밑바닥 - 이 책에서는 툼볼리아라고 부르는- 에 이른 후 죽음의 형식을 통해 현실로 돌아온다는 구조를 지닌다. 그리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영입한 아리아드네가 있다. (감독이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으리라고 확신한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하는 누군가라면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상이 든 간에) 완벽하게 재귀적인 구조를 한 번쯤은 꿈꿔보지 않았을까? 하나의 모티프에서 출발해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다시 그 이야기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펼쳐진 끝에 처음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사실 모든 삶은 재귀적일 수밖에 없다. 무로 시작되어 무로 끝나기 때문에. 출발점에서 놓친 실 끝을 오랜 시간 쫓아 - 중간에 자신이 뭘 찾는지조차 잊어가며 - 힘겹게 잡고 보니 결국 무로 돌아가는 출구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 그리하여 모든 걸 삼키는 공(0)의 개념으로 흡수되는 선(선불교의 선)-툼볼리아에 더글라스 씨는 그토록 매혹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눈 속의 눈, 그 눈 속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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