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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Feb 19. 2024

사랑이란

영화 <호프>

본편 영화에 대해 쓰기에 앞서, 요즘 본 몇 편의 영화 중 매우 기대했던 <3000년의 기다림>은 놀랄 정도로 그냥 그랬다. 뭐랄까… 전반적으로 잘 뽑힌 K-pop을 눈으로 보는 느낌?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때문에 봄)라는 최고 매력적인 배우들의 대놓고 끼 부리는 연기가 가득한 화면도 감각적이고 각종 시대를 섭렵하는 볼 것 많은 배경에 적당하게 치고 빠지는 자극적인 내용도 나쁘지는 않았다… 않았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디서 다 한 번씩 본 듯한 클리셰로 범벅인 장면들과 뜬금없는 내용 전환, 그리고 한국 드라마들을 보고 감명이라도 받았나 싶은 결말까지, 계속해서 당황스럽게 놀라웠다. 감독이 무려 조지 밀러 옹인데?! 뭐, 그 연세에 동시대적인 감각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의미로 대단하다.


그리고 어제는 생일을 맞이해 <호프>라는 스웨덴-노르웨이 합작 영화를 봤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완치됐다고 믿었던 폐암이 뇌로 전이되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통보를 받은 여성이 다음 해 1월 2일 수술대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영화다. (다큐멘터리 아님) 영화의 첫 부분을 보며 내용을 대충 알게 된 후 누가 생일날 이런 영화를 보냐 싶어 그만 볼까도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생일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내용이 없겠다 싶기도 해서 그냥 봤다. 삶은 죽음이 있어 절박한 것이 되고 또한 의미를 갖게 된다.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 많은 남자와 사실혼 관계로 세 명의 아이들을 둔 공연 연출가 주인공 안야는 죽음 앞에 급속히 무너져 내리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런 식의 경우를 소재로 했던 컨텐츠들에서나 혹은 실제의 경우에 있어서도, 내가 접하기로는 대체로 죽음을 앞에 둔 이들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거나 작은 희망에라도 매달리는 것을 지지하기보다는 죽음을 준비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높이 사는 편이었다. 대체로 ‘담담한 슬픔’ 어쩌고로 표현들을 많이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표현을 참 싫어한다. 요란하게 곡소리를 내야 된다는 쪽은 아니지만 뭘 그렇게 절제하고 애써 담담해야 하는지, 그렇게 희망과 절망, 그리고 슬픔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하고 빠르게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정작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 그들의 주위 사람들만 배려하라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식의 스토리는 결국 희박한 성공 확률의 수술을 포기하고 호스피스를 하다가 몇 달 뒤 예정된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여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담담하게 떠나는 식으로 전개되기 십상인데, 이 영화는 정반대로 흐른다. 안야와 안야의 동거인 토마스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난 의료진들에게 필사적으로 연락해서 일말의 생존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들 중 반쯤은 ‘수술 후에 간혹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 정도의 희망을 주기도 하고, 반쯤은 ‘희망은 없다. 수술대에 올라 시간 낭비 하지 말고 맛있는 거 실컷 먹고 잘 놀다가 떠나라’는 식으로 충고를 하기도 한다. 안 그래도 약의 부작용으로 감정이 널뛰고 있는 안야는 자책에서 시작해서 온갖 원망과 분노를 토마스에게 밀도 높게 쏟아내는데, 토마스는 그 와중에 안야와의 결혼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진짜로 둘은 결혼식을 올립니다, 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잠깐이지만 안야가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안야 옆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고 지지해 주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는 안야의 투쟁이 너무나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안야와 토마스의 관계는 볼수록 모호해서, 저게 연민인지, 사랑인지, 미안함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토마스가 이십 년 가까이 시도하지 않았던 청혼과 결혼을 일사천리로 해치우는 것을 안야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저것이 진짜 사랑인가? 이제 와서? 그토록 기다릴 때는 그저 일밖에 모르던 인간이? 중간에 바람도 폈던 저 늙은이가? 안야의 온갖 히스테리를 쭈굴거리며 (간혹 자신에게 너무 잔인하게 굴지 말아 달라고 호소도 한다) 다 받아들이는 토마스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사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안야의 감정이다. 저렇게 짜증스러워하고 화를 내면서도 꾸역꾸역 결혼을 하려는 안야의 감정은 사랑인가, 아니면 보상심리인가?


마지막 장면은 그 감정의 단서가 될 것이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 의식일지도 모를 안야의 눈(시각피질)에 가득 들어온 토마스의 얼굴은, 안야와 함께 어디로든(죽음의 길이라도) 갈 것처럼 보인다. 그걸 보고 마음이 놓이는 걸 보니 나도 꽤나 로맨티시스트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선명하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모호해지기도 할 것이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희망을 버리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 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왜 거기에 의지하고 기대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영화는 예상했던 대로 안야의 수술 결과 따위는 안 알랴주고 끝났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둘은 사랑을 확인했고, 안야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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