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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May 15. 2024

고민 끝에 마지막 캣타워를 해체한 날

명령어: 노묘들의 관절을 지켜라

다음 달이 되면 커피 할배를 만난 지 만 17년이 된다. 한 살 남짓할 때 데려왔으니 꽉 찬 열여덟이다. 요즘은 농담처럼 ‘커피할배’라고 부르는데, 불러놓고도 예쁜 커피의 어디가 할배 같냐며 괜한 호들갑을 떨고는 한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할배의 모습이 묻어 나온다. 그렇게 된 지 꽤 됐다. 꼿꼿하고 곱게 늙은 할배 냥이.


커피를 처음 데려오고 나서 하루 정도 침대 밑에서 상황 파악을 하던 작고 마른 고양이가 처음으로 망설임 끝에 무릎 위로 뛰어올랐을 때를 기억한다. 내 다리 밑을 몇 번씩 오가며 내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들여다보더니 큰 결심을 한 듯 과감하게 올라왔다. 이제 됐다는 나의 안심과 이제 살았다는 너의 안심이 포개지는 순간이었다. 네가 내 눈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그 온전한 믿음이 나는 놀라웠고, 지금도 놀랍다. 내 무엇을 보고 믿음을 주는 것일까? 그 믿음은 당시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 고양이에게는 생존을 위한 모험이고 도박이었고 구원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일상이 된 우리의 기적은 언젠가 네가 내 곁을 떠난 후에 비로소 사무칠 것이라는 것도 마리, 소피와의 이별을 통해 배웠다.


나이가 든 커피의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나는 먼저 떠난 첫째 마리를 떠올린다. 커피와 동갑이니 살아있다면 비슷하게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마리도 살이 빠졌을까? 열두 살에 세상을 떠난 삼색고양이 마리는 열 살이 넘어가자 검은 머리털에 흰 털이 제법 섞여 보였다. 고등어 태비 무늬의 커피는 나이 들수록 주둥이 털이 점점 더 하얘진다. 그건 역시 먼저 떠난 소피할멈과 똑같다. 나는 그 흰 주둥이가 그렇게 귀엽다.


이상한 얘기지만 마리가 그렇게 빨리 떠날 줄 몰랐던 것처럼 커피가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그렇다고 커피가 일찍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고양이의 나이에 대한 인식은 마리를 보낸 후에 생겼고, 커피의 나이를 셀 때면 습관처럼 마리가 떠난 열두 살에 이후의 햇수를 더해 센다. 그러니까 6년이 지났으니 열여 덟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양이들의 안부를 먼저 묻는 주위 고양이 피플들의 커피 또래 고양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작년과 올해, 커피와 동갑내기 고양이들을 순차적으로 떠나보낸 친구는 비장하게 커피만큼은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그래야지….’ 스무 살의 커피는 미지의 영역이다. 내가 알던 스무 살의 고양이들은 대부분 건강이 ‘온전하지 못했다.’ 커피의 스무 살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치매로 일 년여를 고생했던 소피할멈의 절차를 커피가 겪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일까?


그건 여전히 오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다. 커피는 아직 정신과 육체가 온전하고, 아름답다. 취약한 장기인 신장도 아직은 잘 버텨주고 있다. 그의 건강한 노년을 위해 집사는 수면 아래에서 오늘도 열심히 발버둥을 치며 영양제를 챙겨 먹이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래도 좋다, 네가 나와 쥰의 옆에 있어주니.


오늘 집에 있던 마지막 캣타워를 치우고 좀 더 편하게 오갈 수 있는 선반을 조립했다.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도 놓았다. 커피뿐만 아니라 열네 살이 된 쥰의 앞다리 관절에서도 염증이 보인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 끝에 마지막 캣타워도 해체한 것이다. 우리집을 거쳐간 많은 캣타워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구니에 들어가 앉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막내 쥰을 위해 샀던, 바구니로 이루어진 캣타워는 그렇게 대가리(?)만 남기고 퇴출되었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이렇게 싱숭생숭한지, 막상 고양이들은 저 인간이 뭘 또 뚝딱거리며 만들어서 여간 성가시지 않으니 일단 자리를 피하자고 자리에서 대피하는 것이 고작인데 말이다.


기존의 바구니로 이루어진 캣타워는 대가리만 남기고 해체되어 퇴출되고 튼튼한 조립식 앵글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커피할배의 능숙한 계단 이용.

우리 할배는 꼿꼿해요. 정말 꼿꼿하다고요. 쥰은 책표지 공부 중.

쥰은 에셔 작품 감상 중. 여간 고상한 고양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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