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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May 25. 2024

계속 지혜롭기를 바랄 수밖에

셔윈 널랜드 <몸의 지혜>

… 우리는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간에, 언제나 죽음에 가까이 있음을, 그리하여 세포들의 수많은 생태 변화 속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변이의 결과들을 본래대로 복구시키려는 끊임없는 본능적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질대사의 무한히 다채로운 작용 사이에 조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생존 여부는 조화와 질서에 달려 있으며, 인간의 신피질은 생존을 위한 전제 조건 중 질서와 조화를 최우선에 두며 생존의 필요에 반응하고 있다. 질서와 조화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일 뿐 아니라 만족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원인들이기도 하다. 이 두 요소는 미에 대한 추구와 인간관계에 대한 믿음의 토대가 된다. 또한 이 두 가지 요소 위에서 사랑은 심오하고 풍부해질 수 있으며, 이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것이다.

- 셔윈 널랜드, <몸의 지혜>, 김학현 역, 사이언스 북스, 495~6

<몸의 지혜>는 처음 몇 장을 읽어보고는 상당히 오래 책장에 방치해 두었던 책 중 하나다. 이 책은 외과의사인 널랜드 선생이 내부장기출혈로 죽어가는 여성을 어떻게 살렸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로 시작되는데, 그 묘사가 역동적이고도 극적인 것은 나쁘지 않았으나 미국인다운 자기 과시와 자기애, 영웅담에 스스로 고취되어 도파민의 홍수 속에 뛰어든 듯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도저히 호감을 갖고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최근에 교육방송 위대한 수업에 출연한 네스 선생의 책에서 널랜드 선생의 이름을 발견했고, 비로소 다시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위대한 수업을 통해 다시 읽게 된 책들이 제법 있다.) 서양의학의 가장 문제적인 한계로 꼽히는 것이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을 보는 편협한 시각’이라는 의견들이 많은데, 널랜드 선생은 그런 한계를 벗어난 의사이자 작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 년 만에 다시 읽게 된 것이다. (다시 읽어도 첫 부분의 자기도취 부분이 거슬리는 것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작가가 포기했으면 좋았을 그 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몸의 항상성, 성행위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로써의 출산, 심장, 혈액, 면역, 위장을 중심으로 한 대사 작용과 뇌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룰 수 있는 모든 분야의 이론과 임상경험을 흥미롭게 엮어 들려준다. 널랜드 선생 자신의 삶과 경험을 섞어서 매우 쉽고도 재미있게 임상 경험을 들려주기 좋아하는 말 잘하는 의사 선생과 한 일주일 정도 만나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든다.

다 읽고 나면 랜돌프 네스가 왜 널랜드의 작업을 언급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널랜드의 시각이 매우 포괄적이고 종합적이라서 유물론적 진화론과 유물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영역을 매우 자연스럽게 오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과의로서 숱하게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들을 경험한 결과로써 체득한 것이라 설득력이 강하다. 책의 첫인상과 달리 그는 환자를 자신이 다뤄야 하는 일종의 객체로서 다루는 거만한 의사가 아니라 편견 없고 인간의 신체가 스스로 항상성을 회복해 가는 모습에 매번 감탄하고 감동받는 지적이면서도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 내장은 실제로 아주 독립성이 강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장신경계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장신경계는 소화관이 있는 1억 개의 세포(척수에 있는 세포수와 거의 동일한)와 신경 전달 물질 그리고 광범위하고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 분자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메시지를 국부적으로 혹은 먼 거리까지 여기저기 전달한다. 광범위하고 복잡한 회로와 화학 물질은 아주 자동적이어서 때때로 ‘내장의 두뇌’라고 불린다. 진짜 뇌와 내장의 뇌는 자율신경계를 매개로 서로 직접적인 대화를 나눈다. 소화관의 여러 부분에서 생성되는 호르몬과 신호를 내는 분자들이 중추신경계의 이곳 저곳에서 반응을 야기시킨다는 사실로 보아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위의 책, 398

나 자신의 질병(위염과 헬리코박터 박멸에 실패한 전적 등) 때문에 내장에 대한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도 집중해서 읽게 되었는데, 내장의 신경이 호르몬에 의해 크게 반응한다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년 전에 비하면 나의 위장 상태는 꽤 좋아졌지만 (올해 내시경 받으러 가야 하는데 미적거리는 중) 여전히 월경 주기에 따른 호르몬 주기에 요동치는 것은 여전하다. 완경 후에는 괜찮아지기를 바라지만 그때가 되면 또 그때의 문제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요즘은 ‘대사 질환’이라는 용어를 제법 흔하게 접하게 된다. ‘대사증후군’이라는 용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복부 비만과 당뇨에 국한시켰던 예전과 달리 좀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한마디로 먹고 소화시키고 찌꺼기를 내보내는 그 과정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균형을 잃을 때 온갖 질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널랜드 선생의 내장에 대한 부분( 11장의 소제목은 ‘내장 속으로의 항해’)은 이 책이 상당히 오래전에 쓰인 책(1997) 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건강 트렌드를 떠오르게 한다. 내장 속에 음식물이 과도할 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극적이고도 끔찍한 죽음(책에 소개된 에피소드의 환자는 살았지만)을 보며 다시 한번 과도한 알코올이나 당, 밀가루 위주의 탄수화물 섭취로 독립적인 자아가 있을 것만 같은 내장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몸의 지혜>에는 물론 암환자 이야기도 나오고 면역계에 대한 설명도 포함된다. 요즘 면역에 대한 KMOCC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복습하거나 예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게다가 새로 읽고 있는 책은 강의를 통해 알게 된 미생물의 대가 존 잉그럼 씨의 <미생물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다. 한참 우주과학에 빠져있던 동안은 비현실적으로 멀리에만 두고 있던 시각이 요즘은 한없이 가까운 곳을 향하게 된다. 더불어 인간의 시력이 어중간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 없는 곳이 없다는 미생물을 육안으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ㅠㅠ  (한편 <위대한 수업>에서는 헬리코박터를 발견한 베리 마샬 선생의 강의가 진행 중이라 그 시간에도 위벽에 증식해서 꿈틀거리는 그 미생물들을 보게 된다. 내 위도 저랬겠지 생각하며 헬리코박터의 증식을 억제한다는 영양제를 다시 찾아먹게 되었다. 마샬 선생님, 항생제 내성이 생겨서 박멸을 못한 경우는 대체 어떻게 해야 된답니까?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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