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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Jun 08. 2022

027 슬기로운 정치생활 (2)

(2022. 06. 03. 기고)


2. 의사결정 과정


     의사결정을 위한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면, 다음으로 집단 또는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과정’과 관련하여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참고로 이 내용은 자명한 의사결정의 기준에 관한 것보다는 사회적으로 의견대립, 갈등의 요소가 있는 주제에 관한 것입니다).


     개인마다 사회마다 판단의 기준과 가치관,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으므로, 가상의 ‘사상의 자유시장(自由市場)’에서 토론․토의와 같은 ‘의견교환 절차’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절차, 상호존중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 실현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사회에서의 각종 의사결정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토론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권 교체, 이익집단 압력, 여론몰이 등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합니다(쓰레기통 모형).


    예컨대, 에너지 정책은 미래세대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차대한 쟁점으로서, 보다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에너지 시장에 공개되거나 채택된 의견은 일도편향되기 일쑤였습니다. 탈(脫)원전의 찌라시가 돌아다니는가 싶더니, 어느새 친(親)원전의 찌라시로 도배됩니다. 현실성 떨어지는 탈원전이 해답은 아니겠지만, 강력한 친원전 정책으로의 급격한 선회 또한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왜냐하면 안전사고, 폐기물처리비용, 무역상 불이익 등 기존에 원자력발전의 문제점으로 거론된 사항들에 대한 대책마련 없이 되살린 것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정권이 내세우는 정책은 자칫 지지세력의 이권과 결탁되기 쉬운 만큼, 근자에 에너지 분야에서 구세주 기술처럼 논의되는 SMR(소형묘듈원자로) 또한 '벌거벗은 임금님' 사례로 판명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좀 더 많고 다양한 전문가들을 한데 모아 열린 마음으로 의견을 들어 봐야 합니다.


    산업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스마트폰 이후 전기자율주행차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들 하나, 전문가들 중에서는 내연기관차 산업과의 투 트랙 전략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전기차는 배기가스를 내뿜지 않는 교통수단으로 각광받는데다가, 미래시장 선점의 차원에서 전기차 연구개발과 지원이 필요한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다만 19세기 마차 산업에서 내연기관차 산업으로 급속하게 이전한 것과 달리 현 시점에서 모든 내연기관차가 조만간 전기차로 대체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19세기에는 말의 배설물보다 배기가스로 인한 오염이 덜 심각한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자동차 산업에 필요한 근로자 규모 또한 마차 산업의 그것보다 더 크게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력생산구조에 비추어 아직까지 전기차가 반드시 친환경적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데다가, 전기차의 혁신성․내구성이 오히려 수요 감소와 일자리 감소를 가져와 내연기관차를 둘러싼 근로자 및 산업생태계(에너지-제조-판매-금융-정비)에 불이익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아울러 내연기관차의 친환경 연료 개발이나 배기가스 저감기술 개발은 전기차 배터리의 안전문제, 충전시간, 충전장소 문제를 불식시키는 대안으로 작용하기도 하므로, 전기차 일도 편향의 정책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토론과정은 고사하고, 공정한 시장 자체가 있는지 국민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현실에서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우글거리고, 가짜언론이 연막을 칩니다. 공동체주의의 이상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혈연, 지연, 학연의 연고주의가 대체합니다. 철인(哲人)정치를 내세워 ‘공동체를 위해 이 한 몸 바칠’ 자신을 대표자로 뽑아달라고 하면서도, 내심 어떤 욕망이 꿈틀거렸을 뿐, 플라톤이 엘리트의 청렴이나 사유재산 금지를 주장했던 참뜻은 애써 외면합니다. 중앙집권화된 금융에 반기를 들고 평등사회를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암호화폐가 탄생하였다고들 하나, 막상 코인, 디파이(DeFi), 엔에프티(NFT) 생태계에서는 사기, 다단계, 자전거래가 판칩니다.

     시민들의 혁명을 부추키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혁명 후 새로운 독재가 시작됩니다. 국민을 선동하거나 프락치를 심어두어 좌와 우로, 동과 서로, 남과 여로, 청년과 노년으로 분열시키고 극혐하게 합니다. 팬데믹을 기회로 사이비 종교는 득세하고, 교주는 미래에 겁박당한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합니다.

   이래서 ‘판을 짰다’고들 말하는가 봅니다(심판매수, 비판자 탄압, 상대편 분열, 운동장 기울이기 등).          


     그렇다면 국민이 누군가에 의해 짜여진 판에서 놀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즉 불공정, 사기, 강박, 착오 등의 하자있는 의사결정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1) 가장 기초되는 것은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집권층이 국민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정치철학자들 중에서는 공론장(public sphere)을 통한 숙의민주주의 또는 토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등의 말로 표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각종 정보공개청구나 청원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그런데 국민의 정치참여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정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보과잉으로 인한 정치극단주의와 배타주의인데 주로 가짜언론, 댓글부대, 정치권의 선동 등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주제에 대한 과몰입은 여론전의 판을 짜는 세력에 의해 국민이 놀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의 뜻대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는 정치-경제-언론의 잘못된 유착관계를 좀 더 강하게 끊어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팬덤정치도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정치참여가 좋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누가 시간 쪼개서 정치생활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문화나 정치는 삶에 여백이 있어야 풍부해집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국민이 시민적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도록 국가가 보조해서라도 국민을 '생존형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자신의 꼭두각시 노릇에만 충실하거나 그게 아니면 정치에 관심갖지 않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살기를 바라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보조와 분배의 안건에 대하여 훼방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국민들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흐를 수도 있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헬조선’과 같은 좌절감이 싸여 정치권에 대한 맹목적 비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참여를 위한 기초적인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한 분배의 문제는 세원확보방법으로 인해 해결점을 찾기가 쉽지 않으나, 최소한 부분별한 선심성 복지정책 등 세수가 누수되는 곳을 찾아 적재적소로 재배치하는 방안도 모색해 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 국민은 사회의 각종 부조리에 대항하여 거리로 나가거나 촛불을 들었던 기억이 있으므로 건전한 참여민주주의의 발전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자신의 정치 목적에 이용하는 행태는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들 또한 스스로 정치적 소양을 기르고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2) 또한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서의 지도자들이 바로 서야 건강한 민주주의로 성장할 수 있는데, 특히 정치인들이 모범을 보이고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집단의 의사결정은 대부분 대의제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특히 정치적 필요악이라 불리기도 했던 ‘정당’을 매개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당정치에서 정당들 사이에는 집권이라는 공통목표를 향한 경쟁이 필수적이므로 상대 정당을 이기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전략전술이나 선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적 중대사안에 대해서는 협치가 바람직하지만, 견제와 감시라는 순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경쟁과 대립이므로, 건전한 정책비판과 대립은 오히려 권장될 사항입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도에 지나치면 악이 뿌리내리기 시작하듯이, 집권연장을 향한 영생의 꿈은 상대 진영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보복으로 얼룩지게 할 때가 많습니다. ‘조조를 놓아준 관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영웅주의적 신념 때문일 수도 있고, ‘적을 칠 때에는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철저하게 짓밟아 놔야 한다’는 현실정치논리 때문일 수도 있는데, 대부분 와각지쟁(蝸角之爭)에 불과한 논쟁거리를 두고 뭐 그리 대단한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목소리 내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같은 정당 내에서도 권력의 배분을 두고 파벌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 전쟁과 분단, 냉전의 시대, 군부독재 등을 거친 특수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정쟁이 더 격할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일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격동의 역사를 거친 국가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미천하고 미성숙하다 평가할 일도 아닙니다. 경제발전만큼이나 시민의식 또한 많이 성숙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 ‘이러이러해서 여기까지밖에 못 해.’라고 한계를 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정치인들이 모범을 보이고 바로 설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긴합니다. 실제로 희망사항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위기가 상시화된 작금의 현실에서 국민들과 정치권은 모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환경위기, 에너지위기, 식량위기, 보건위기 속에서 더 이상 갈등과 보복의 정치를 멈추고 정당하고 공정한 견제와 대립을 통해 부강한 대한민국으로의 재도약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는 정책에 밝고 강직하면서도 현명한 인품을 갖춘 자입니다. 지도자는 탐관오리와 사기꾼들로부터 국민을 지킬 줄 알고, 정의를 몸소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국제사회는 제국주의 시대와 크게 다를바 없이 여전히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지배해오고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지도자는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험난한 국제정치 속에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여러모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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