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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09. 2020

30대 마지막 여름휴가는 '자연적'이었다.

변하지 않는 건 서울 뿐이다.



2020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필수교과목으로 환경이 들어가야 하는 데에는, 그게 명분이든 실리든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너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 쟁기 끌고 논밭 갈던 모습이 사라진지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물 좋고 공기 좋던 시절이 끝난 지금, 우리는 마스크 외 특별한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제시할 수 없다. 고작해야 오늘은 집 밖에 나가면 안된다 정도? 그럼 아이들은 물을 것이다.


그럼 우린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음악평론가 모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8090 노래를 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노년세대가 소시적 고향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지금 한창을 누릴 세대가 지금을 누리지 못하고 불과 이삼십년 과거의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이돌 탄생을 지켜보고 소비한 나다. 이제는 누가 나와도 전혀 색다르지 않고 누군지조차 모르겠다. 이미 포화상태라는 거다. 투에니원을 컨트롤씨 컨트롤 브이해서 만든 블랙핑크를 굳이 내가 찾아서 들어야 할 이유를 말해봐라. 저성장 시대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 인류가 보여 줄 수 있는 단기간 최대의 고도성장을 보여준 한국이다. 아빠는 말한다.


아침에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저녁에 와보니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더 정밀해지고 더 기교가 넘쳐난다. 허나 그것이 '인간의' 경제성장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는 점이 절망적이다. 차는 그냥 가고 서고 기능만 하면 된다. 거기서 뚜겅이 열리고 말고 하는 대부분의 옵션은 '사치'다. 게다가 자율차가 나오면? 내가 굳이 없어도 만찬은 계속되는 것이다.

2100년이 되면 지구 상당 부분의 대륙이 잠긴다고 한다. 2050년만 되도 지구 온도 상승으로 외부 활동이 어렵다고 한다. 2020, 전례가 없이 내려치는 빗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홍수 조심 뿐이다. 이 쯤 되면 심해탐사, 슈퍼지구 발굴에 수백조씩 투자하는 회사들이 결코 바보는 아닐 거라는 점도 느끼게 될 것이다. 최근 모 학생이 교육청에 기후위기시대에 필요한 교육을 해달라고 주구장창 찾아가서 졸랐다. 결국 교육청은 수용했고 이에 따른 교육 중장기계획이 마련되었다. 엔포세대가 386세대에게 경제를 원망한 정도에 비할 바가 못되는, 매우 생물본능적인 요구라고 생각한다.




난 사람 많은 곳이 싫다. 그냥 기본적으로 싫다. 휴가철 떡꼬치며 핫도그며 음료수에 잔뜩 손에 들고 너도나도 뭔가 하겠다고 줄 서서는 우왕좌왕 득실득실, 쓰레기통 넘쳐나는 그림만 생각해도 질색팔색이다. 사람에 쓸려 다니며 뭔가를 즐기기 위해 어딘가를 간다는 건, 내 기준에서는 그냥 남들하는 거 나도 해봐야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건 쉬는 게 아니다. 가장 무도회다.


북상한 태풍을 뒤로 하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결혼 직전 15년 12월의 겨울에 찾은 고흥. 여기에 조용한 앞바다를 품은 허름한 호텔 하나가 있다. 이번엔 세 식구가 찾아왔다. 5년 반만이다.

아직도 여긴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해변가엔 딱 세 가족 뿐이다. 멀찌감치 텐트 쳐 놓고 각자의 휴식에 몰두한다. 아들은 바다가 무섭단다. 모래놀이만 주구장창한다. 난 물에 들어가 해수욕을 한다. 바닷물에 한참이고 들어가 있으면 피부병이나 몸에 난 상처, 습진 이런게 말끔히 날아간다. 나는 치료 차원에서 바닷물이 좋다. 천상 아저씨다.

수백 수천의 바닷게가 모래 틈새로 구멍을 파 놓고는 고개를 빼꼼거린다. 하나를 잽싸게 낚아채 아들을 보여주니 '책에서만 보던 게가 이런 모습이었다니!'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내는 사진 찍으랴, 공차기 하랴, 물에서 첨벙첨벙 하랴 무지 바쁘다. 뚱뚱이 칭구는 공차기로 종목을 바꿔서 신난다고 온 해변을 누비며 뻥뻥 공을 날려댄다.

아내는 한적함을 즐길 줄 알아 좋다. 그래서 우리는 인적이 드문 자연유산, 문화유산을 잘 골라 간다. 갈 때마다 추억이 누적되어 더욱 마음에 든다. '그 땐 여기에 그거 있었는데 없어졌네 아쉽다' 소리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엄마아빠와 자주 갔던 곳을 만들어 주려 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 아들은 21세기 이전 한반도 이남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될 수도 있다.


변하지 않는 건 서울 뿐이다.


휴가를 다녀와서 링겔을 맞았다. 내 인생에 링겔 맞은 건 딱 세 번. 20대에 전역 후유증으로 한 번. 작년 후배 사망 직후 쇼크로 한 번. 그리고 이번이다. 의사가 권해줬거니와 나도 도저히 안되겠어 맞았다. 약이 거의 다 떨어져 갈 쯤 갑자기 몸에 피가 돌았다. 진작 맞을 걸. 이제 좀 걸을만 하다.


병상에 누워 이마를 잡고 왜 이렇게 되었을까 되짚어보니 다다른 생각의 꼭지는 '무장해제'였다. 작년엔 이사한다고 휴가 패스, 재작년엔 애가 너무 어려 패스, 17년도엔 수행비서 때라 대기모드 패스. 간만에 하이패스를 너무 긁었다. 나사를 풀고 최선을 다해 바닷가를 뛰었더니 최선을 다해 몸이 갔다. 마음은 원빈 아저씨지만 몸은 뚱보 아저씨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이고 엄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녁에 아들을 데리고 전주역으로 나갔다. 아들은 서울 할머니 온다니 "아빠 같이 가요!" 신나서는 잽싸게 따라나선다. 요 녀석  "안전벨트 해주세요!" 하고는 가는내내 뒷좌석에 앉아 "속절없는 세월~~ 탓해서 무어해~~ 내 인생의 태클을 거지마아~~" 발음도 어눌해서는 태평하게 노래 잘도 부른다. 니가 속절없는 세월이 뭔지나 알고 부르냐 파핫 헛웃음이 나온다.

오늘 아들은 영유아검진을 받았다. 키가 평균치보다 조금 미달 결과가 나와 아내는 속상해했다. 이대로 큰다면 아마 내 키 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속이 별로 상하진 않았다. 뭐 키가 작다고 욕먹고 놀림받고 그런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내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나랑 어깨를 나란히 하니까 푸학.

역시 소리가 나온건 언어사회성이었다. 다 정상으로 나왔지만 언어인지능력에서 만점이 나온건 정말 나로서는 기분 좋았다. 아들은 31개월에 들면서 사실상 성인과의 일상대화에 별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가령 사소한 걸로 엄빠의 말소리가 바빠지기라도 하면 "시끄러워. 서원이 티비 보잖아요. 아빠 그만 얘기해. 아 엄마도 시끄러워! 조용히 해." 혼줄을 낸다. 할 말이 뭐였지 하다가 그냥 웃어버린다.

엄마는 전주에 내리니까 살 것 같단다. 서울은 온통 비바다에 '비가 와도 걱정 안오면 찜통' 세상세상 이런 세상도 없단다. 엄마 내년이면 칠순이다. 엄빠가 결심을 잡숩고 합가했으면 좋겠다. 이제 그만 서울을 내려놨으면 좋겠다. 아내가 먼저 이런 말 안했으면 나도 선뜻 못꺼낼 이야기다.

엄마는 돌아오는 차에서 며칠 전 '성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엄마는 늘 외할머니 다음으로 성구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했다. 자식들 그래도 건강히 장성해서 그럭저럭 사시지 않았느냐 했더니 돌려깎기로 먼저 돌아가신 '창수' 할아버지 흉을 봤다. 그리고는 창수 할아버지의 엄마, 그러니까 '익선동' 고모 할머니의 동생, 울 엄마의 작은 고모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창수 할아버지 흉이니 놀림거리니 이런 건 많이 들었지만 작은 고모 할머니 이야긴 처음이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고모들은 모두 서울 '마님댁'으로 시집갔다. 익선동 할머니는 사업가, 작은 할머니는 고위공무원과 결혼하셨다. 요즘에야 일산이나 서울이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산은 말그대로 산골짜기 다람쥐였다. 그런 걸 보면 김씨 집안은 엄마 말마따나 "양반이겠어 어디 그 시골에? 족보사고 그랬겠지." 양반인 척 했지만 그건 아니고 구파발역 일대를 중심으로 조선후기에 급성장한 중인계급인 게 맞는 듯 싶다.


두 여인의 남편복은 지지리도 없었다. 익선동 할아버지는 아들딸 낳고서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큰 고모 할머니는 근성이 있었다. 회사는 공중분해되고 남은 건 집 한 채 달랑이었어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동대문에 게딱지처럼 박혀서는 못먹고 못살던 그 시절에 동대문 '핵인싸'로 활약했다.

작은 고모 할아버지는 중앙청에 근무하던 중, 어느날 쥐도새도 모르게 실종되었다. 엄마는 지금까지 아무도 그 분의 실종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 다시 한번 탄식 소리가 나왔다. 작은 고모는 졸지에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 들춰업고서 두테미 마을로 돌아왔고, 마을의 큰 집 할아버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이 여인에게 집과 논밭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어릴 적 뻔질나게 놀러가던 성구네집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더 가슴을 조이는 건 죽으면 죽었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엄빠 세대의 삶이다. 넉넉한 집도 귀향하면 수도권 인근이나 저 어디 아는 집 한 곳 없는 외딴 고장으로 가지 고향으론 거의 안간다. 그 세대의 대부분 돌아간 사람들은 '마을의 실패자'로 낙인된 까닭이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전통사회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이 세대에게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지 않는 한은 내가 지켜본 바로는 얄.짤.없.다.

고로 "절대 수도권 밖은 안돼!" 부르짖는 내 또래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간다. 정규 자리를 준다해도 그 울타리는 절대 벗어나지 않겠다는 '결기 찬' 의지는 사실 타의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는 타고타고 불타올라 이제 막 서울권의 인구수가 비서울권을 앞지르는 수치로 나타났다.

누가누가 더 힘든가 라떼시절 라떼지금 시합해봐야 사실 아무 의미도 없다. 다 같은 서울배를 타고 가는 마당에 '먼저 내리시오 그럼 나도 내리겠소' 하면 누가 먼저 내리겠나.

다만 나는 그저 작은 고모 할머니가 "너 인생 나랑 한번 바꿔 살아볼래?" 물으면 절래절래 고개만 저을 것 같다. 창밖은 온통 비로 뿌옇게 물들었다. 보드카에 토닉워터와 깔라만시를 섞어 마시며 후 하고 코로 뿜어낸다. 몸이 뜨겁다. 내 30대 마지막 여름휴가는 지극히 자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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