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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Aug 28. 2020

제 아이는 모차르트가 아닌데요?

82년생 육아 대디



책을 굳이 읽어 보지 않아도 홍보 문구를 보고 '아 이건 낚시다' 하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 어떤 책은 아주 교묘한 설명으로 독자를 혹 하게 만드는 수법을 펼치기도 한다.

최근 [재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라는 책이 나왔다.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이 재능을 만든다'는 광고 카피를 봤다. '천재는 타고난 것이 아니다'는 논리를 쓰는데 다짜고짜 모차르트를 예로 들어 헛웃음에 글을 남긴다.

차라리 '야나땡' 마냥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을 두고 글을 팔아야지 인류사에 기리 남을 천재를 골라서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니 '떽! 네 이○!' 이건 전혀 들어맞지 않는 논리다.

나는 첫째의 태교음악으로 에센바흐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 앨범을 택했다. 모차렐라 형님 특유의 재기 발랄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명작은 정말 수백 번을 들어도 나와 아내 전혀 질림이 없었다. 수백 년이 지나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은 '신중하게 계획해서 연습하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우린 그저 좋아서 들었던 것이지 자식이 '신이 내린 악동'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육한 것이 아니었다.

모차르트가 어릴 적 하루에 10시간씩 훈련시킨 아버지 레오폴트를 예로 들며 성공의 비결은 부모에게 달렸다고 말하다니. 이것 참 희망고문과 정신승리를 한데 묶어놓은 격이다.

과연 아버지가 혹독하게 훈련시켜 모차르트가 잘 되었을까? 이건 사실 베토벤에게도 물아봐야 답이 나올 문제다. 베토벤도 아버지가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은 물리적으로 같다. 허나, 베토벤의 아버지는 '실패한 궁정악단' 콤플렉스에 걸려 새벽이면 술에 취한 친구들을 불러놓고 자고 있는 아들을 억지로 흔들어 깨워 연주를 시다.


모차르트도 잘 나가는데 넌 대체 뭘 하는 거냐?


물리적인 연습 값으로 보면 모차르트나 베토벤 둘 다 조기에 '혹독한 연습'을 거친 점에서는 특별난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교육환경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북돋는 아빠와 때리는 아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같은 결론을 내린다.


아버지 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둘 다 아버지를 '탈출'했다. 그럼 물어보자. 아버지가 잘해서 두 아들이 세계의 걸작을 만들었을까? 당구 치는 동안에도 생각나는 대로 쓱싹쓱싹 곡을 쓰는 모차르트가 과연 연습과 창작을 마냥 고통으로 생각했을까? 열세 살의 나이에 단 한 번도 악보가 공개된 적 없는 12분짜리 성당의 미레 제제 합창곡을 딱 한 번 듣고 암보해 버린 이 꼬마에게 훈련이란 수식어는 매우 낯설다. (훗날 이 암보에 성공한 작곡가는 역시 천재라 불리는 멘델스존, 리스트 두 사람뿐인 걸로 안다.)

27개의 피아노 협주곡, 41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플루트, 하프, 오보에, 클라리넷 뭐 하나 악기 가릴 것 없이 쏟아지는 협주곡, 사중주, 독주곡, 오페라, 미사곡, 장엄곡 등 30년 동안 수백 개의 걸작을 만들어 낸 한 인간의 역사를 놓고 '너도 모차르트처럼 될 수 있어'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다.

난 요즘 매일 아침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을 틀어놓는다. 2악장을 반복해서 듣는데 정말 온 세상의 축복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 느낌에 들을 때마다 전율이 솟는다. '아. 이게 인간인 걸까' 몇 번이고 고개를 젓는다.

그 정도의 재능을 얻겠다고 애를 잡으면 열이면 아홉 부모나 자식이나 하얗게 불타고 말 것이다. 부모는 아이 성질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된다. 이상을 놓고 현실을 맞추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맞추어 아이가 생각하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람다운 것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책 하나.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가 겪은 고통이 내 자식, 자식의 자식, 그 자식의 자식까지 대물림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담은 책이다.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을 하기 전에 앞서, 신중하게 계획되지 않은 유전의 흔적이 내 자식에게 어떻게 내려앉았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한다. '대체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따지기에 앞서, 내 모양의 일부가 '너에게 이렇게 전달이 되었구나'를 이해해야만 나를 용서할 수 있고 아이를 '내버려' 둘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한국사회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본분에도 큰 오해가 잔뜩 껴 있다. 본분의 '본'은 원래 가진 성질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사실 이걸 바꾸는 것보다 지구와 목성의 위치를 바꾸는 게 더 쉽다. 말 그대로 본'born'이다.


그렇다면 분은 무엇인가? 흔히들 분수에 맞게 살라고 한다. 젊은이들은 크아앙 대노한다.


니가 뭔데 분수 타령을 하느냐!


앞의 '본'을 침착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나는 예민한 성격에 위계통의 질환을 수십 년째 달고 산다. 많은 양의 음식을 소화할 수 없고 그 선을 넘으면 금세 탈이 난다. 고로 나는 타고난 체력과 체량을 고려하여 '분배' 내지는 '안배' 한다. 에너지를 나누어 골고루 쓴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알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면 최소한 '사회적 물의'는 피할 수 있다.


'재능은 노력이다'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내재적 동기가 재능을 만든다'는 이들에게 말한다.


노력은 재능이다.


내 아이가 어떤 분야에 유독 힘쓰는지, 그것 집중하면 된다.


내 아이가 꼭 '불멸의 재능'을 가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모차르트는 듣고 싶으면 그냥 들으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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