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침에 잠이 깼다. 올해 봄부터 가슴팍에 가래가 낀다. 아침 내내 누런 가래를 뱉는다. 벌써 반년이 넘었다.
심장이 조여 오고, 숨을 쉬면 쌔액쌔액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소리가 난다. 못 이겨 일어나 물을 마셔도 별 다른 소용이 없다. 서재에 불을 켜고 들어가 "황해"를 봤다.
4시쯤 아내가 여보여보하고 부른다. 왜 그래 하니 서원이가 우유 달란다. 큰 냉장고의 우유는 다 먹었다. 작은 냉장고를 열고 있으려니 아들 녀석이 눈도 못 뜬 채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컵의 반을 따라 주니 들이키지 않고 한 모금 한 모금 와인 시음하듯 가글 하며 천천히 마신다. 우유의 진미를 맛보는 것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거실에 앉아 그렇게 5분 동안 마셨다. 마주 앉아 아들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이 녀석 다 먹고 나더니 배시시 웃고는 그 자리에 누웠다. "여기서 자면 안돼요" 꼭 안아 잠자리에 눕혔더니 또 걸어 나와서는" 여기서 잘래요" 한다.
다시 자리에 눕혀 토닥토닥하니 이불 달란다. 꽁꽁 싸매고 자는 게 딱 아내 모습이다.곤히 잠에 빠진 처자식을 옆에 두고 생각해본다.
우린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눈만 내놓고 사는 세상이 길어진다면, 마스크 사회가 된다면 우린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예전엔 입을 크게 벌려 활짝 웃었어. 울 때는 입술을 꼭 깨물곤 했었어. 콧구멍도 벌름거리면서 울었어. 자신감에 찬 웃음이란 건 그게 미간이 중요한데 아무튼 그런 게 있었어. 비웃음을 짓는 건 나쁘지만 그런 표정도 있었어. 감동 어린 표정이란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정말 멋있었어.
눈 아래 표정이 퇴보한다면, 그리고 그 표정을 사회적으로 습득하지 못한 세대가 태어난다면 세대 간 소통방식의 교집합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반면 기존의 수많은 표정들이 눈과 눈썹으로 집약된다면 그땐 우린 미세한 눈짓 하나로도 수많은 바디랭귀지를 구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스크 사회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가 고정적으로 쓰는 근육은 바뀔 것이며, 얼굴의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짓는 섬세한 표정을 기록이라도 해야 하나.
누우면 기침이 터지는 통에난 일어나 버렸다.
아내가 책상을 사줬다. 내가 사달라고 했다. 좌식이 너무 불편해진더러 허리가 아팠다. 그리고 창밖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쭈그려 앉아서는 전주천을 감상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전주천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것. 그것이 이 책상에서 해야 할, 해내야 할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달리 용무가 없으면 그것을 위해 책상 주변을 깔끔하게 비워둔다.
위스키는 고급주다. 술에 대해 격식을 갖추면 술도 역시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준다. 빗살무늬가 새겨진 글라스와 얼음통, 차디찬 술병 이 세 개와 물 한 잔이면 된다. 안주는 술 본연의 맛을 훼손시키므로 필요 없다.
글라스에 얼음을 대여섯 개 넣고 술은 글라스의 반 정도 채운다. 이때 바로 마시면 곤란하다. 스트레이트가 아니다. 얼음과 술이 만나기를 기다리자는 뜻이다. 잠시 책상 너머의 지나가는 가로등 불 찻소리를 감상한다.
코로 빙하수를 몇 번이고 들이키면 저 깊은 암반수의 냄새가 난다. 심호흡으로 뱃속까지 빨아들인다. 차디찬 글라스를 입술에 대어 산골짜기 계곡물을 들이켠다. 와. 정신이 번쩍.
자세가 편해야 밖의 사물도 뚜렷하게 보인다. 동이 트기도 전 스스스 짙게 깔린 물안개 사이로 동동 떠가는 오리 식구들, 우거진 풀 사이사이마다 듬성듬성 피어있는 이름 모를 야생꽃, 강아지를 데리고 어슬렁어슬렁 산책 나오신 할머니. 다 작년 이야기다.
왜 우린 그동안 집 안에만 있으면 답답했을까? 그건 집이 답답해서가 아니라 집에 머문 시간이 그만큼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급급했던 심정이 지금의 우리를 더 조여 오는 것은 아닐까? 왜 코로나 19가 발병했는데 부부싸움과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일까? 혹시 집 안에서의 각자 존중해야 할, 그리고 이리저리 섞어 살아가야 할 삶의 규칙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날씨 좋은 주말엔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는 공식은, 마치 주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집 밖으로 내다 버려야 한다는, 덜컹덜컹 숨 막히게 돌아가던 삶의 바퀴에 바깥 여가의 기름칠로 잠시 상처를 덮으려는 우리들의 강박감으로 만들어진 것이겠다 싶다. 바로 이 책상에 앉아보니 말이다.
천을 꼭 만져봐야겠나. 고기를 잡아서 가져오고, 꽃은 꺾어서 물병에 하루 두고 버리고, 가까스로 돌아온 백로를 바로 내 눈 앞에 둬야 직성이 풀리겠나.
그냥 이렇게 창을 하나 두고 전주천과 거리를 두고 마주하니, 큼직큼직 그려놓는 풍경과 보일 듯 말 듯 찍어 그려 넣은 사람의 관계가 옳거니 그렇겠다 싶다. 때로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쉰다. 그래야 서로 가진 매력을 다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