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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Sep 15. 2020

그냥 집이 답답했던 건 아닐까?

82년생 육아 대디



기침에 잠이 깼다. 올해 봄부터 가슴팍에 가래가 낀다. 아침 내내 누런 가래를 뱉는다. 벌써 반년이 넘었다.

심장이 조여 오고, 숨을 쉬면 쌔액쌔액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소리가 난다. 못 이겨 일어나 물을 마셔도 별 다른 소용이 없다. 서재에 불을 켜고 들어가 "황해"를 봤다.

4시쯤 아내가 여보여보하고 부른다. 왜 그래 하니 서원이가 우유 달란다. 큰 냉장고의 우유는 다 먹었다. 작은 냉장고를 열고 있으려니 아들 녀석이 눈도 못 뜬 채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컵의 반을 따라 주니 들이키지 않고 한 모금 한 모금 와인 시음하듯 가글 하며 천천히 마신다. 우유의 진미를 맛보는 것이겠다 싶었다. 그렇게 거실에 앉아 그렇게 5분 동안 마셨다. 마주 앉아 아들이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이 녀석 다 먹고 나더니 배시시 웃고는 그 자리에 누웠다. "여기서 자면 안돼요" 꼭 안아 잠자리에 눕혔더니 또 걸어 나와서는" 여기서 잘래요" 한다.

다시 자리에 눕혀 토닥토닥하니 이불 달란다. 꽁꽁 싸매고 자는 게 딱 아내 모습이다. 곤히 잠에 빠진 처자식을 옆에 두고 생각해본다.


우린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눈만 내놓고 사는 세상이 길어진다면, 마스크 사회가 된다면 우린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예전엔 입을 크게 벌려 활짝 웃었어.
울 때는 입술을 꼭 깨물곤 했었어.
콧구멍도 벌름거리면서 울었어.
자신감에 찬 웃음이란 건 그게 미간이 중요한데 아무튼 그런 게 있었어.
비웃음을 짓는 건 나쁘지만 그런 표정도 있었어. 감동 어린 표정이란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정말 멋있었어.


눈 아래 표정이 퇴보한다면, 그리고 그 표정을 사회적으로 습득하지 못한 세대가 태어난다면 세대 간 소통방식의 교집합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반면 기존의 수많은 표정들이 눈과 눈썹으로 집약된다면 그땐 우린 미세한 눈짓 하나로도 수많은 바디랭귀지를 구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스크 사회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가 고정적으로 쓰는 근육은 바뀔 것이며, 얼굴의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짓는 섬세한 표정을 기록이라도 해야 하나.


누우면 기침이 터지는 통에 난 일어나 버렸다.


아내가 책상을 사줬다. 내가 사달라고 했다. 좌식이 너무 불편해진더러 허리가 아팠다. 그리고 창밖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쭈그려 앉아서는 전주천을 감상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전주천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것. 그것이 이 책상에서 해야 할, 해내야 할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달리 용무가 없으면 그것을 위해 책상 주변을 깔끔하게 비워둔다.


위스키는 고급주다. 술에 대해 격식을 갖추면 술도 역시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준다. 빗살무늬가 새겨진 글라스와 얼음통, 차디찬 술병 이 세 개와 물 한 잔이면 된다. 안주는 술 본연의 맛을 훼손시키므로 필요 없다.


글라스에 얼음을 대여섯 개 넣고 술은 글라스의 반 정도 채운다. 이때 바로 마시면 곤란하다. 스트레이트가 아니다. 얼음과 술이 만나기를 기다리자는 뜻이다. 잠시 책상 너머의 지나가는 가로등 불 찻소리를 감상한다.


코로 수를 몇 번이고 들이키면 저 깊은 암반수의 냄새가 난다. 심호흡으로 뱃속까지 빨아들인다. 차디찬 글라스를 입술에 대어 산골짜기 계곡물을 들이켠다. 와. 정신이 번쩍.


자세가 편해야 밖의 사물도 뚜렷하게 보인다. 동이 트기도 전 스스스 짙게 깔린 물안개 사이로 동동 떠가는 오리 식구들, 우거진 풀 사이사이마다 듬성듬성 피어있는 이름 모를 야생꽃, 강아지를 데리고 어슬렁어슬렁 산책 나오신 할머니. 다 작년 이야기다.


왜 우린 그동안 집 안에만 있으면 답답했을까? 그건 집이 답답해서가 아니라 집에 머문 시간이 그만큼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급급했던 심정이 지금의 우리를 더 조여 오는 것은 아닐까? 왜 코로나 19가 발병했는데 부부싸움과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일까? 혹시 집 안에서의 각자 존중해야 할, 그리고 이리저리 섞어 살아가야 할 삶의 규칙조차 마련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날씨 좋은 주말엔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는 공식은, 마치 주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집 밖으로 내다 버려야 한다는, 덜컹덜컹 숨 막히게 돌아가던 삶의 바퀴에 바깥 여가의 기름칠로 잠시 상처를 덮으려는 우리들의 강박감으로 만들어진 것이겠다 싶다. 바로 이 책상에 앉아보니 말이다.


천을 꼭 만져봐야겠나. 고기를 잡아서 가져오고, 꽃은 꺾어서 물병에 하루 두고 버리고, 가까스로 돌아온 백로를 바로 내 눈 앞에 둬야 직성이 풀리겠나.


그냥 이렇게 창을 하나 두고 전주천과 거리를 두고 마주하니, 큼직큼직 그려놓는 풍경과 보일 듯 말 듯 찍어 그려 넣은 사람의 관계가 옳거니 그렇겠다 싶다. 때로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쉰다. 그래야 서로 가진 매력을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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